코스닥위원회와 증권업협회, 벤처기업협회 등의 법률 및 정책자문역을 맡고 있는 AT그룹 배재광 대표의 이력서는 여기까지는 여느 사시 합격생과 별로 다르지 않다. 하지만 배대표에게는 결정적으로 변호사 자격증이 없다. 직접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폭넓은 의미의 법조인으로서 또는 투자를 담당하는 벤처캐피털의 CEO로서의 길을 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꼭 법정에 나가서 변호를 해야 법조인인 것은 아니지요. 그보다 저에겐 더 하고 싶은 일이 있었어요.”
하지만 이것이 사법연수원을 중도에 포기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2년 과정인 연수원 교육은 6개월 정도로 줄여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머지는 실제 필드에서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지요. 공부방식도 현실을 법률에 접목하는 과정이 아니라 이제까지 우리 교육의 주류였던 주입식이라 싫었어요. 무조건 외우는 거였거든요. 판결문을 잘 외우면 점수가 잘 나오는 거죠.”
무엇보다 그를 숨막히게 했던 것은 글을 쓸 때였다. 3칸 들여써야 하는데 2칸 들여쓰면 점수가 깎였다. 제목을 쓸 때는 몇 칸, 그 다음 줄 쓸 때는 몇 칸 띄우고, 하는 시스템에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던 것.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까지는 멋졌던 친구가 연수원의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거의 규격화된 ‘법조인’으로 굳어지는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일상적인 법조인으로서의 삶에서 마음이 떠난 결정적인 계기는 정말 하고 싶었던 정보통신 및 벤처업계의 현실 경험이나 케이스를 다룰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배 대표는 그래서 ‘딴 길’을 찾았다. 미국의 웹사이트를 모조리 훑고 다녔다. 그리고 벤처나 정보통신이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것을 확신했다. 내친 김에 97년 사법연수원 28기 동기 13명과 벤처법률지원센터를 차렸다. 낮에는 연수원 생활, 밤에는 벤처법률지원센터 일을 했다. 또 연수원 내 컴퓨터 동아리인 ‘열린 마당’의 회장을 맡으면서 연수원 동료들에게 인터넷을 가르치고 PC통신 하이텔에서 법률상담을 해줬다.
국내 첫 ‘벤처 법률서비스’와 전문적으로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인터넷법률상담(www.cyberlaw.co.kr)은 벤처업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벤처붐이 일던 1999년 여러 벤처기업에서 그를 임원으로 영입하면서 한때 그의 직함은 10개가 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3월 대부분의 직함을 정리하고 로펌과 벤처캐피털, 벤처법률지원센터 3개를 계열사로 둔 ATG(Advanced Technology Group)를 설립했다.
“흔히 로펌은 단순히 법률적인 사항을 검토해 계약서를 마련해 주는 수동적인 역할에 그치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시너지효과가 있다고 하면 기업인수합병(M&A) 파트너 자체를 바꾸는 역할까지 하고 싶은 거예요. 흔히 변호사들은 의사결정구조에서 배제되고 법률적인 부분만 검토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벤처캐피탈까지 같이 세운 거죠.”
그는 한 해 500억원씩을 퍼부으며 규격화된 법조인을 양성하는 사법연수원 제도를 언젠가는 손질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변호사의 역할이 단순히 ‘소송 대리인’이나 ‘계약서 작성자’에 그치는 이유는 법조인력 선발과 양성시스템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변호사가 더 많아져야 해요. 그래야 경쟁하면서 서비스의 질도 높아지고 그동안 변호사들이 가지 않았던 여러 분야로도 진출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박현진 기자 witnes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