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년씨(68)의 어린 시절은 온통 오현집(지금의 서울 도봉구 번동 드림랜드 자리)의 추억으로 채워진다. 앞산 뒷산 소나무가 울창한 언덕 위의 오현집은 솟을대문 안으로 안채와 사랑채, 아래채, 번방(산지기들이 사용하던 방)을 갖춘 전통 한옥이었다. 조선 인조대에 청나라로 끌려가 치욕을 당하면서도 굽히지 않던 청음 김상헌 선생 이래로 10대가 줄곧 4대문 안에서 살았으나, 한일합방이 되자 고조부(당시 형조판서 김석진)는 세상을 버리고 보지도 듣지도 않겠다며 오현으로 옮겨왔다. 그 집에서 고조부는 자결했다.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불타기 전까지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 삼촌, 고모, 당숙, 당고모, 김숙년씨 5남매 이렇게 4대 40여명이 오현집 돌담 울타리 안에서 살았다. 그 시절 하루가 멀다 하고 돌아오는 제사와 어른들 생신 등 별스러운 날이 아니어도 그 많은 가솔이 한 끼 먹는 일 자체가 큰 일었다. 어머니의 손끝은 마를 날이 없었지만 대신 집안에는 4계절 내내 구수한 음식 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이른 봄 제일 먼저 싹이 돋아나던 큰사랑 화단의 원추리를 캐내 된장국을 끓이면 집 안 가득 봄향기가 났고, 복사꽃이 필 무렵이면 작은사랑 뒤 축대 사이에 돋아난 비비추를 데쳐 초고추장에 무치고, 한여름엔 화단에 핀 옥잠화를 따서 옥잠화고기볶음을 만들고, 이때쯤 연한 맨드라미잎을 넣은 된장찌개가 상에 올랐다. 초가을에는 얼큰한 곤대국과 동부를 넣고 지은 밥에 토란국, 늦은 가을엔 도톰하게 썬 무에 데친 배추속대와 표고버섯, 쇠고기를 넣고 갖은 양념을 하여 푹 끓인 무왁저지와 각종 버섯볶음이 일품이었다. 겨울이면 배추속대국, 곰국, 김칫국을 끓이고 할아버지 진짓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던 찌개-무젓국찌개, 명란찌개, 두부찌개, 퉁퉁장찌개-가 뚝배기에 담겨 상 위에서 바글바글 끓곤 했다.
밤나무 가랑잎이 뒤굴뒤굴 구를 때쯤 동짓달부터 다음해 초여름까지 먹을 김장을 담갔다. 동지팥죽과 같이 내놓을 동치미, 심동에 먹을 곤쟁이젓깍두기, 멸치젓깍두기, 증조할아버지가 잡수실 채깍두기, 찌개거리용 호박짠지, 고춧잎 삭힌 석박지, 봄에 입맛을 돋우어주던 씨돌이김치…. 김치광에 묻어놓은 독만 일흔두 개요, 장독대엔 장정이 들어가고도 남는 큰 다릿골독이 식구 수만큼 있었다. 또 다른 광에 들어서면 마늘장아찌, 조기젓, 황석어젓, 새우젓, 어른 진짓상에 오르는 전굴젓, 땅에 묻힌 진장 등이 담긴 항아리가 줄을 섰다. 늘 준비된 묵은 반찬들 덕분에 사랑채에 별안간 손님이 들어도 어머니는 걱정하지 않으셨다. 그곳은 어머니의 보물창고였다.
▼대가족 안에서 손수 익힌 그 시절 그 맛 책으로 엮어▲
5남매의 장녀였던 김씨는 일곱 살 때부터 늘 손이 모자라는 할머니, 어머니를 거들며 어깨너머로, 혀끝으로 음식을 배웠다. 또 장 담그고 밑반찬 만드는 법은 청주 한씨였던 외할머니로부터 배웠다. 김씨의 외할아버지가 고종황제 비서였던 까닭에 외할머니는 정갈한 궁중음식도 잘하셨다. 여름엔 장조림, 가을엔 게장, 무말랭이장아찌, 콩자반, 소라젓, 꼴뚜기젓 등 외할머니는 어린 손녀를 옆에 앉히고 밑반찬 만드는 법과 그릇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김씨가 대학(이화여대 가정과)을 졸업하고 스물 여섯에 결혼해 3남매를 낳고 20여년간 창문여고 교사로 재직하며 일과 가정을 오가는 분주한 생활 속에서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맛은 어렴풋한 기억으로 남았다. 교직에서 물러나고, 3남매를 출가시키고, 4년 전 남편마저 세상을 떠나자 김숙년씨는 문득 50여년 만에 오현집 어린 시절로 돌아가 소꿉놀이를 하고 싶어졌다. 이가 부실해 고생하셨던 증조할아버지를 기억하며 “골찜을 만들었으니 은주합에 삼해주를 따뜻하게 데워 드릴까요?” 할아버지께는 “묵초를 만들었으니 송순주를 드시겠어요?” 옷매무새와 칼질하는 법을 직접 가르쳐주셨던 아버지께 “어란을 칼창같이 얇게 썰었으니 드셔 보세요.” 소꿉놀이하던 댕기머리 소녀의 마음을 담은 책이 ‘김숙년의 600년 서울음식’(동아일보사 펴냄)이다.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어가며 350가지나 되는 음식을 차렸는데, 돌아서면 또 빠뜨린 게 생각나니 아쉽기만 합니다.”
김씨가 가장 아쉬워하는 음식은 무장이다. “메주에다 소금물을 부어 4~5일 두었다가 국물을 따르고 찬 국물에 밥을 말아 양지머리 편육 얇게 썬 것을 얹어 먹으면 그 맛이 일미죠. 평양사람들이 한겨울에도 동치미 국물에 냉면을 말아먹었듯 서울사람들은 무장에 찬밥을 말아먹었어요. 할아버지가 참 좋아하셨는데 무심하게도 그 음식을 빠뜨렸으니 죄송하죠.”
김씨는 ‘600년 서울음식’을 펴내면서 서울 토박이 음식만 고집하지 않았다. 개성에 살던 외삼촌이 배워와 온 식구가 즐겨먹은 황태무찜(무에 황태를 넣고 갖은 양념으로 찜을 하면 그 국물에 비벼 먹는 밥맛이 꿀맛이다), 부산 피난시절 그 맛을 알게 된 아귀찜도 넣었다.
“짜지도 맵지도 않고, 양념과 부재료를 아껴 원재료의 맛이 살아 있는 담백함이 서울음식의 특징이에요. 그러나 서울에는 팔도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니 음식도 다양해질 수밖에 없지요. 더욱이 한국전쟁이 지울 수 없는 역사이듯 피난시절 음식도 우리에게는 역사입니다. 저는 서울 토박이 반가에서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먹고 살아왔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 책을 만들었습니다.”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요리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 가서 요리를 배운 적도 없지만 김숙년씨는 혀끝의 기억만 가지고 전통음식을 하나하나 복원했다.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집안 어른께 달려가 자문을 구했다. 우설찜은 돌아가시기 직전 큰고모님이 마지막으로 알려준 요리였다. 이렇듯 정성을 다한 ‘600년 서울음식’은 단순한 요리책이 아니라 반가의 예의범절과 생활문화가 담겨 있는 역사책이나 다름없다.
음식 이야기가 깊어지자 어느새 배가 허전하다. 김숙년씨가 내온 따끈한 국물에 쫀득한 묵이 하늘거리는 묵초를 한술 뜨니 뱃속이 금세 뜨듯하다. 묵은 김치가 시어지다 못해 골마지 낀 것을 씻어내고 꼭 짠 다음 지진 김치를 손가락 끝으로 길게 찢어 하얀 밥 위에 돌돌 말아 얹고는 한입에 쏙 넣는다. “그래, 이 맛이야.” 김숙년씨의 요리가 자꾸 멀어져가는 고향을 단단히 붙들어매 준다.
< 김현미 주간동아기자 >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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