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가만히 들여다 본 '우리의 상처'

  • 입력 2002년 2월 13일 17시 30분


시인 황학주(48)가 다섯 번째 시집 ‘너무나 얇은 생의 담요’(세계사)를 펴냈다. 87년 데뷔한 뒤 98년 ‘늦게 가는 것으로 길을 삼는다’ 등 네 권의 시집을 통해 그는 ‘고통과 슬픔을 재료로 삼아 사랑을 빚어내는 몸의 연금술을 보여준다’(문학평론가 이경호)는 평단의 상찬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의 시 속에는 여러 차례 덧난 상처 같은 아픔이 웅크리고 있다.

‘바람과 햇빛이 날마다 비질해 지나간/누군가 조금이라도 찢어 먹일 수 있는/앓아 누운 네 아내에게나마 먹일 수 있는 한 조각/영혼 비슷한 것이라도 네게 있느냐’ (‘없습니다’ 전문)

용서받지 못할 죄업을 가슴 깊이 묻어두고 있는 듯한 자세. 그에게 ‘마치 벌서고 있는 느낌 같다’고 말을 건넸다. 알 듯 모를 듯 시선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또한 흡사 벌 받는 모습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목소리는 사뭇 달라져 있다. 다섯 번째 시집 ‘너무나 얇은 생(生)의 담요’(세계사)에서 그는 예전의 가슴 뜯어내는 울음 대신 훨씬 잔잔한 율조를 띄워낸다.

‘바다는 딴 색으로 잔잔해져 있었습니다/마을은 바다 건너에서 잔광을 받고/야생화들이 흙길 끝까지 가서/진흙수렁마저 향기였습니다’ (첫 편지)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의 새 시집 중간은 열여덟 편의 이국적인 ‘케냐 시편’으로 채워졌다. 1997년 선교사로 훌쩍 떠나 나이로비에서 40㎞ 떨어진 카지아도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번 시집은 지난해 돌아와 처음 묶어낸 시집이다.

‘만년설 한 줄기/파랗게 고랑을 갈았다/단지 내 경작은 부끄러움의 높이까지 올라가/나에 대해서 기다리는 일/’(케냐 시편 2·킬리만자로)이라는 구절처럼 아득한 자연 속에 언뜻언뜻 비치는 죄의식의 울림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그는 ‘단출 교사 일곱 칸 안으로/신발은 신은 채 어둠이 들어가고/그래도, 누더기 속에 안고 싶은/나의 작은 안녕’(케냐 시편 3·깃대)을 누린다.

“지금까지는 내 상처를 제대로 떠안지 못해 쩔쩔 맸습니다. 이제는 이웃의 상처가, 사람이라는 존재를 둘러싸며 우리를 연관짓고 있는 아픔들이 보입니다. 이제 이 아픔들을 작업의 동력으로 사용하게 되겠지요.”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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