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 나 같은 딸이라면 걱정할 거 하나 없겠다!”
이런 대화가 오간 적 없는 가족 있으면 손들어 보시라.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는 어버이의 사랑은 가이 없다지만 오늘도 부모는 ‘너 같은 자식이나 낳으라’며 저주(?)를 퍼붓고 자식은 ‘아버지처럼 살기 싫으니 간섭 말라’고 쏘아 붙인다.
10대 후반과 20대 초반. 스스로는 어른만큼의 부피를 갖는다고 생각하지만, 부모가 보기에는 가운데 뚫린 구멍만큼이 부족한 ‘도넛’ 같은 나이다. 불만 많은 6명의 ‘도넛’이 얼마 전 저녁 시간에 서울 이화여대 앞의 한 패밀리레스토랑에 모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부모 세대에 대한 ‘잔인한’ 흉보기를 시작했다. 자신들의 적나라한 일상도 공개했다.
#부모의 ‘말 바꾸기’ vs 도넛의 ‘거짓말’
공(명식)〓얼마전 소설 ‘코리아닷컴’을 읽고 태백산맥을 혼자 여행하고 싶어졌어. 그래서 엄마한테 말했더니 안된다는 거야. 고등학교 때는 “대학 가면 혼자 여행을 가도 된다”고 하시더니만 막상 진짜 간다고 하니까 말리시더라고. ‘나는 개방적인 부모’라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얼마나 보수적으로 변하는지 몰라.
김(지태)〓난 이번에 대입 원서 쓸 때 그랬어. 어렸을 때부터 외교관이 되고 싶다고 하면 “그래, 지태는 외교관이 되면 잘 할 거야” 이런 분위기였는데 막상 원서 쓸 때 되니까 ‘사’자 붙은 직업이 좋다고 법대 가라고 하더라고. 난 아버지가 ‘외교관이 되기 위해 가장 좋은 곳’을 추천해 주실 줄 알았거든.
홍(지은)〓여행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난 혼자 여행가면서 친구들이랑 간다고 거짓말 한 적 있어. 여자 혼자 간다면 걱정하실 게 뻔하거든.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는 때도 있는 것 같아.
공〓우리 엄마는 평소에 “여자친구 생기면 어려워하지 말고 이야기해라” 하셨거든. 대학 입학 후 처음 여자친구를 사귀었을 때 ‘여자의 심리’가 너무 궁금해 엄마에게 상담을 했어. 근데 정작 필요한 조언은 안 해주고 “사귀지 말고 친구로만 지내라” 하시는 거야.
유(근영)〓부모님의 말이 자꾸 바뀌니까 우리도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 같아. 도대체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혼란스러워지거든.
이(정한)〓책 값 ‘삥땅’하는 게 가장 흔한 거짓말이지. 나는 보통 책값의 15% 정도는 부풀리고 권수도 한두 권 올렸어. 엄마가 책 가져와 보라고 하면 예전에 샀는데 거의 손도 안 대서 깨끗한 책을 보여드리는 거지.
문(주영)〓용돈은 ‘비상금’이 아니라 ‘문화생활을 위한 수단’인데 부모님들은 충분히 주지 않으려는 것 같아. 그래서 별 수 없이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생기는 거지. 돈 없으면 여자친구 사귀기도 어렵고 친구한테 빈대 붙을 수밖에 없어 비굴해지잖아.
공〓한번은 친구 3명과 부산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밤이 되니까 친구가 함께 온 여자친구랑 커플이라고 둘이만 방에 쏙 들어가버리는 거야. 그 녀석이 부모님께 여행 허락을 받으려고 나를 들러리로 세웠던 거지. 둘이만 여행 간다면 안 보내주셨을 테니까.
유〓우리 세대는 아직 어려서 환경에도 영향을 받는 것 같아. 지방에서 학교에 다니거나 자취하는 친구들 중에는 남자친구랑 동거하는 경우도 있어.
#부모세대의 불치병은 ‘명문대 병’
공〓내 친구 커플은 부모한테 헤어졌다고 거짓말하고 몰래 사귀고 있어.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닌데 여자쪽 부모가 내 친구 학벌을 못마땅해 하시니까 거짓말을 했나봐. 남자애는 요즘 ‘사랑을 위해’ 편입시험을 준비하고 있지.
이〓나는 이번에 경영학과에 진학하려고 했어. 그랬더니 점수에 맞는 대학이 아빠 성에는 안 차는 거야. 아빠는 ‘인문계열은 간판이 중요하다’며 다른 대학의 낮은 학과에 원서를 넣으라고 하시더군.
김〓내 친구 하나는 공부를 꽤 잘했는데, 만화 그리기도 참 좋아했어. 실력도 수준급이었지. 하지만 그애 부모님은 만화 그리는 학과에 진학하는 것을 엄청나게 말리시더라고.
홍〓부모세대는 새로운 도전보다는 안정적인 일을 원하셔. 안 그러면 불안한 거지. 나는 부모님이 교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기어코 국문학과에 진학했어. 취업이 어려워지니까 부모님은 ‘거 봐라. 그때 교대 갔으면 좋았잖아’하시며 혀를 차시지.
#실패하더라도 경험은 소중한 것
유〓우리 엄마는 남자친구에게 쉽게 정 주지 말라고 말씀하셔. 너무 깊게 사귀다 보면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거지. 하지만 헤어지는 아픔도 경험해봐야 한다고 생각해. 부모님 보시기엔 남자친구와 헤어질 때 마음이 아플까봐 그러시는 것 같은데, 난 그런 아픔이 오히려 우리를 크게 만든다고 생각하거든.
공〓난 대학 입학 후에 등산코스 정상에서 음료수를 팔아 봤어. 처음에는 떼돈 벌 줄 알았어. 그런데 땀 뻘뻘 흘리며 5시간 동안 고작 5000원어치 팔았지. 평일 등산객들은 대부분 음료를 준비해 오더라구. 하루 만에 아르바이트를 포기하는 쓰라림을 겪었지만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해.
홍〓맞아. 부모님 보기에는 결과가 불 보듯 뻔하더라도 직접 부닥쳐 보는 것은 소중하다고 생각해. 상처받고 실패하면서 배운 것들은 평생 소중한 자산이 되는 법이거든. 걱정이 되더라도 시행착오의 과정을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어.
#그래도 역시 우리 부모가 최고
유〓세대갈등이야 어찌됐건 ‘그래도 역시 우리 부모가 최고’라고 여겨질 때도 많잖아. 얼마 전 엄마랑 대판 싸우고 학교에 갔는데 엄마가 보낸 e메일이 와 있는 거야. 눈물이 핑 돌더라.
공〓아버지랑 대중 목욕탕에 갔을 때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럼 돈 필요하겠구나’ 하시면서 신용카드를 만들어 주신다는 거야. 등 밀어드리는 손에 힘이 딱 들어가더라니까.
홍〓나도 그런 적 있어. 지난 학기말에 동아리 종강모임이 있었는데 잔소리 들을 각오하고 말씀 드렸더니 엄마가 필요하면 쓰라고 신용카드를 내주셨거든. 의외의 순간에 감동을 주는 걸 보면 부모님 생각이 우리 수준을 뛰어넘는 건 분명한 것 같애.
#‘도넛’의 성(性)과 사랑
문〓부모님은 우리가 성에 대해 지나치게 개방적일 것이라고 지레 ‘오버’해 걱정하는 경향이 있어. 물론 혼전 순결에 집착하는 애들이 많진 않지만, 이건 우리 세대가 유달리 문란해서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김〓(기자를 쳐다보며)언론이 부추긴 면도 있지. 예컨대 채팅사이트가 ‘청소년 문란함의 온상’인 것처럼 보도하는 거. 대다수 고교생은 인터넷을 단순히 이성친구를 만나는 교제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말야.
홍〓주위를 보면 성에 개방적인 애들이 점점 늘어가는 것 같아. 동거하는 친구들도 있고. 조건이 되면 얼마든지 같이 살 수 있고 결과에 대해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애들도 적지 않은 것 같아.
유〓그런데 성 개방을 주창하는 애들이 오히려 부모에게 알려지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하더라. 담배를 피우는 것도 대개는 숨기고. 좀 이중적인 것 같아.
이〓성에 대해 당당한 아이들도 많잖아. 중학교 때 한 친구는 자신이 ‘트랜스젠더’를 꿈꾼다고 당당히 밝혔어. 이 친구(남)는 자신의 ‘성 정체성’이 여성이라고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거든. 부모님들은 우리 세대의 사랑이 ‘인스턴트식’이라지만 부당한 비난 같아. 짝이 자주 바뀌어서 그렇지 사귀는 순간만큼은 ‘온 마음 다 바쳐’ 진심이거든. 나는 고교 2학년 때 짝 사랑하던 여자애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 두 달이나 공을 들였어. 부모님한테는 말씀 안 드렸는데 금방 들통났어. 용돈 달라는 횟수가 많아지고 전화통화도 2시간씩 했으니까. 부모님이 공부에 방해될까봐 걱정이 되셨는지 학교까지 찾아오셨더라고.
유〓고등학교 때는 남자 친구 있는 게 공부에 정말 방해가 되던데 뭘. 신경도 많이 쓰이고 아무래도 공부하는 시간을 뺏길 수밖에 없지. 하지만 대학 입학 후에는 같이 도서관에서 공부도 할 수 있어 오히려 도움이 되는 면도 있어.
문〓남녀 사이에 편한 친구도 있을 수 있는 건데 우리 부모님은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하면 결혼이라도 시키려는 것처럼 ‘집안은 어떠냐’, ‘아버지는 뭐하시냐’고 물어보셔.
홍〓그래서 나는 남자친구가 있어도 부모님께 잘 이야기 안 하는 편이야. 만나는 사람 있다고 하면 여러 가지로 복잡해지거든. 나중에 확신이 생기는 사람이 나타나면 말씀드릴 거야. 그런데 요즘은 졸업할 때가 되니까 사귀는 사람 없느냐고 은근히 자꾸 물어보셔.
이〓우리 세대의 이성관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고 생각해. 내 친구들만 봐도 여자 보기를 돌같이 보고 공부만 하는 수도승 같은 애도 있고, 여자친구가 한 달에 한 번씩 바뀌는 애들도 있거든.
정리〓박정훈 기자 sunshade@donga.com
김승진 기자 sarafi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