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피뢰침이 나오면서 제우스의 벼락은 소용없게 되었지만 그의 벼락이 상징하는 ‘정의’(正義)까지도 피뢰침 때문에 소용없게 되었는가? 신화를 읽는다 해서 정말 페르세포네 덕분에 봄이 온다고 믿을 21세기 아이들은 없다.
그들을 즐겁게 하는 요소는 다른 데 있다. 이해력이 높아지면서 아이들은 페르세포네가 죽음과 재생을 이어주는 순환질서의 친근한 인간화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연현상에 사람의 이름을 붙여주어 사람이 되게 하는 신화적 의인화(擬人化)의 장치 덕분에 자연은 사람과 말을 트고 친해진다. 그때부터 인간과 자연은 서로 이해하고 걱정해주는 친화관계로 들어간다. 자연의 이런 인간화는 자연을 착취할 궁리를 하게 하기보다는 사랑하고 존경하게 한다.
페르세포네를 만나기 위해 봄의 들판으로 달려나가는 것은 나쁘지 않다. 봄바람에서 그녀의 숨결과 따스한 체온을 느끼는 일은 나쁘지 않다. 진달래 개나리에서 그녀의 화사한 얼굴을 만나고 즐거운 웃음소리를 듣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시인 신경림의 어떤 시에는 처녀들의 웃음소리 때문에 북한산 골짜기에 봄이 온다고 읽어도 될 만한 이미지들이 나온다.
사람 즐겁게 하는 이런 이미지를 ‘비논리적’이라는 이유로 추방할 것인가? 신화와 시는 동서양을 통틀어 궁극적으로 한 통속의 언어다. 동양 시인은 처녀들의 웃음소리 때문에 봄이 온다 하고, 서양 신화는 페르세포네의 웃음소리 때문에 봄이 온다고 말한다. 페르세포네는 지하 왕 하데스의 아내지만 그녀의 신화적 상징은 ‘처녀’(kore)이다.
물론 신화는 비논리적일 때가 많다. 세계와 신과 인간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신화들을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 비논리성은 논리가 도달하지 못하는 진실의 차원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창조신화에서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과학적 설명이 아니다. 신화 독자는 과학이 없어서 신화를 읽는 것이 아니고 합리적 설명이 모자라서 신화로 달려가는 것도 아니다. 종(種)의 기원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듣고자 한다면 생물학을 찾을 일이다. 우리가 기원신화를 읽는 것은 거기서 궁극적으로, 그러나 마치 처음인 것처럼 ‘우리 자신’을 만나기 때문이다.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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