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문고 61회 동창생들 "그때는 이랬지요"

  • 입력 2002년 3월 5일 16시 58분



나이를 먹어가는 게 어디 사람 뿐이랴.

무심히 지나치던 거리를 불현듯 멈춰서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 봤는가. 그러면 죽어 보이던 거리의 온갖 것들이 슬그머니 일어나 말을 거는 것 같지 않은가. 때론 속삭이고 때론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도시는, 이 거리의 풍경은 어쩌면 늘 그렇게 우리에게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거리의 풍경이란 그러니, 다름아닌 우리의 얼굴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길 옆의 집들과 건물, 심지어 하찮은 보도 블록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세월의 흔적을, 그리고 자신의 나이듦을 확인한다.

그럴 때 풍경은 죽은 도시의 정물에서 걸어 나와 정겨운 친구가 된다.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친구. 게다가 그 친구가 우리네 삶의 기억을 나이테처럼 간직하고 있는 친구라면, 그런 친구의 발견은 얼마나 든든한 힘이 될까.

# 기억의 유물들#

34년 전 겨울 저녁. 서울 덕수궁 앞 한 다방에 소년 8명이 모였다.

이날 대학입학 예비고사를 치른 소년들에게 다방 출입은 그들 나름의 ‘성인식’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2002년 초봄 오후. 소년들은 초로의 나이가 돼 이곳을 다시 찾았다.

‘태평다방’이었던 간판은 ‘다방’ 대신 ‘커피숍’이란 ‘현대식’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젊은 날의 아지트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때 이 자리였지” “아니 저쪽 테이블인 것 같기도 한데…”

휘문고(61회) 졸업반이던 소년들은 나이 50을 넘겨 흰 머리가 제법 나 있다. 그때 이 다방에서 평생 우정을 변치 말자며 만들었던 ‘지향회’. 모임은 이제 ‘육일(61)회’가 됐지만 친구들은 부부와 함께 만나며 늙어가고 있다.

태평다방과 함께 자주 모이던 다방이 또 있었지만 그곳은 이제 사라져버렸다.

“새 건물이 들어서서 흔적도 남아 있지 않더군.”

이수찬씨의 말엔 오래된 소지품을 잃어버린 듯한 서운함이 배어 있다.

졸업하고 30여년을 만나면서도 왜 이곳에 와 볼 생각은 못해봤을까. 지나온 삶의 무게가 그리 버거웠을까.

중년의 신사들에겐 오랜만에 찾아온 다방이 반가우면서도 낯설다.

“그때 다방 뒤에 법원 건물이 있었고, 또 뭐가 있었더라.”

그때를 더듬는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그러나 주인이 내온 쌍화차 한 잔이 마술을 부린다.

차 속에 든 반숙 계란 한 개.

“그래 맞아. 그때는 커피에 계란을 넣어 먹었지. 그걸 모닝커피라고 했는데….”

쌍화차는 순식간에 시간을 30년 전으로 되돌려준다.

“그때 유행했던 비키의 ‘화이트하우스’ 밤새 듣던 것, 기억나?”

“그랬지. 그때 많이 추던 울리불리 춤 배우려고도 했었지.”

‘태평다방’은 이들에게 과거의 기억을 여는 문이었다.

#옛 풍경들

청계천이 시멘트 바닥으로 뒤덮이기 전. 뱀장어도 잡고 보트놀이도 하던 시절이었다.

“겨울에는 거기서 스케이트 탔지.”

그럴 수 있었던 서울은 대도시라기보다는 정겨운 동네였을 뿐이다.

학교 파한 뒤 뚝섬에서 밭일을 하고 고무신에 밀짚모자 차림으로 다방에 나타나곤 해 ‘영감’이라 불렸던 배태원씨.

결국 경기 평택에서 농장 일을 하고 있는 그는 지금의 콘크리트 도시 서울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젠 서울 올라오는 것 별로 안 내켜. 평택도 자꾸 서울을 닮아가니 마음 같아선 더 내려가고 싶어.”

이수찬씨도 그때의 기억 한 토막을 꺼낸다.

“나하고 용서가 그때 주간지에 펜팔 회원 광고를 낸 적이 있잖아. 하루에 편지가 열통씩 오는데 주소를 ‘미아리 이수찬’이라고만 적었어도 편지가 오곤 했어.”

식목일에 나무 심으러 한강을 건너갔던 강남 모래벌이 지금은 코엑스가 돼 젊은이들의 무대가 돼 있지만 그때도 봉은사 솔밭은 애용하던 데이트 장소였다.

주말에 천마산이나 강촌 가는 경춘선을 타면 맨 뒤 화물칸에 젊은이들이 자연스레 모여들어 기타를 치며 노래하곤 했던 시절이다.

#가난했지만 아름다웠던 시절#

지향회는 거의 매주 등산을 갔다. 산이 좋기도 했지만 취미로 즐길 만한 것도 마땅치 않았던 때. 맨몸으로 할 수 있는 건 등산이 고작이었다.

“등산복도 제대로 없었지.”

“다들 워커(군화) 신고 다녔지. 남대문 시장 가서 사온 군화 목을 잘라서 등산화라고 만들었잖아.”

뭉툭한 배낭엔 삶은 감자나 양파에 된장 정도 싸가면 성찬이었다. 일행 중 한 명이 장만한 버너는 귀중품 대접을 받았다.

누군가 가져온 그때의 사진. 48장 짜리 똑딱이 카메라로 찍은 흑백사진은 누렇게 바래 있다.

하지만 사진 속 청년들의 눈은 지금도 반짝거린다. ‘청춘의 빛’이 찬란했던 시절이었으므로.

#더 아름다운 날들을 위해#

이들이 공부하던 모교 교사(校舍)는 지금은 없어졌다. 학교를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옛 계동 학교터는 현대건설 사옥으로 바뀌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렇게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얼마전 총동창회 행사가 있어 모교에 갔다가 들어가본 교실. 히터까지 들어오는 쾌적한 환경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갈탄 난로에다 점심 도시락을 구워먹던 시절을 애들은 알까….’

수업시간이면 연기에 반찬냄새가 섞여 가시지 않았지만 도시락을 같이 나눠먹던 그 재미와 우정.

가난했기에 더 소중한 것을 배웠던, ‘역설의 시절’이었다.

“지금까지 만난 세월만큼 앞으로도 우리 건강하게 만났으면 좋겠어.”

‘추억의 힘’으로 멋진 우정을 나눠온 이들의 은발 머리 위로 오후의 햇살이 잘게 부서졌다. 30년 전 그 아름다웠던 날들처럼.

이명재 기자 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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