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호 감독의 추억 더듬기 "명동극장-통기타의 기억은…"

  • 입력 2002년 3월 5일 16시 58분


이장호 감독의 데뷔작 '별들의 고향' (1974년)
이장호 감독의 데뷔작 '별들의 고향' (1974년)
만 쉰일곱살이 되어 이제 겨우 인생의 절반을 살았다고 최면 걸 듯 열심히 되뇌곤 하는데 날더러 벌써 노인처럼 옛 추억을 더듬으라고 하니 사회가 나보다 더 조로(早老)하는 모양이다.

정말 요즘은 너무 빨리 늙어간다. 청소년 시절이 지나기 무섭게 세상 물정이 빤한 기성세대로 편입되어 버리는 오늘의 세태, 구태여 세대의 구별이 따로 필요 없다.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며 결국 서글픈 심정으로 어쩔 수 없이 기성세대에 편입되었던 것에 비하면 지금의 젊은애들은 그걸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긴다. 내가 갖은 고초를 겪으며 지냈던 청년기의 그 아름다운 시행착오는 오늘의 젊은애들에겐 전혀 찾을 수 없다. 핍박도 없고, 겁도 없고, 소외감도 없고, 괴테도 없고, 헤세도 없고, 톨스토이도 없고, 도스토예프스키도 없다. 그대로 시장에 나가 이익 챙기기에 눈을 반짝인다.

이런 말을 하면 웬 박물관에서 나온 소리냐고 힐난한다. 모두 그렇게 스피디하게 생각을 바꾸어야만 밀레니엄 세상에 적응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세태를 보면 나는 마치 고속도로에서 규정 속도 110㎞/h를 훨씬 넘어 휑하고 달려가는 과속의 자동차를 보듯 불안하다. 얼마 가지 못해 그 속도위반은 엉망진창의 모습으로 도로 한가운데 발랑 뒤집혀져 나타날 것만 같다. 실제로 외환위기 때 그런 모습을 한국이 보여주었다.

또 요즘 언론에 오르내리는 각종 게이트 사건의 화려한 면면들이 포토라인 앞에서 카메라의 집중 세례를 의젓하게 받는 모습을 보면 역시 같은 느낌이다. 벼락성공의 주역들이 너무 흔해서 혹시 본인이나 사랑하는 가족들에게조차 그 범죄가 부끄럽기는커녕 도리어 자랑스럽게 여기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최근에 나는 내가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동네로 다시 이사와서 매일 꿈길에서처럼 살고 있다. 물론 이곳도 많은 풍경이 인위적으로 상스럽게 변했지만 그래도 북아현동의 골목길들은 예전 그대로다. 복수물 약수터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안산의 봉원사로 넘어가는 길목의 성황당 돌무더기도 며칠 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제는 모처럼 시간이 나서 청년기에 살던 추억의 동네를 순례해 보았다. 나 살던 옛 집은 간 곳이 없고 뻘건 벽돌 다세대연립주택 건물의 어두운 골목으로 바뀌어 어이없는 모습이었다. 4·19와 5·16을 지나는 동안 어두컴컴한 다락방 안의 글래머 캘린더걸, 흑백 TV 시절의 가수들, 미국 TV영화들, 슈퍼스타 신성일의 짧은 머리, 윤복희의 미니스커트와 장발족의 기억, 모두가 타임머신처럼 순식간에 왔다가 멋대가리 없는 다세대연립주택으로 바뀌었다.

정말 너무 많은 것이 사라지고 말았다. 소공동, 지금의 조선호텔 앞에는 우리가 사랑했던 명화의 전당, 경남극장이 있었고 거기 유도대학도 있었지. 또 미도파 옆에 간신히 끼어있었던 영화관 미우만, 뮤직홀은 라스카라였던가? 명동으로 가면 명동극장, 명동서점, OB’s 캐빈, 오비뚜우르, 심지, 설파, 코지코너, 통기타 가수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이장희, 양희은…. YWCA엔 청개구리 홀이었던가?

아! 기억이 자꾸 사라진다. 풍물도 사라지고 기억마저 사라진다. 밤 12시가 넘으면 통행금지가 있었다. 동아방송 심야방송에 출연하면 야통증을 해주었지. 영화를 보기 전엔 꼭 문화영화라는 정부의 홍보, 캠페인 영화와 국립영화제작소의 뉴스를 보아야만 했고 얼마 후에는 극장에서 애국가가 나오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거리에서도 태극기 하강식 때엔 애국가와 함께 가던 길을 멈추어 예의를 갖추어야만 했다.

소설가 김승옥이 인기스타처럼 나에게 우상이었던 시절이었다. 그의 문학이 국내 최초의 주간지에 샅샅이 소개되던 때였다. 그는 시나리오와 영화감독을 거침없이 해낸 몇 안 되는 소설가였다. 그리고 최인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청년문화 선언을 하고 대중가요의 가사, 시나리오를 왕성히 써댔다. 그리고 영화감독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작가였다. 최근엔 ‘상도’라는 대하소설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 이제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여는 나이가 되었다고 스스럼없이 말할 정도로 70년대 청년문화의 기수는 멋쟁이 할아버지가 되었다.

나는 가끔 우스갯소리처럼 내가 병역기피자 3대의 핵심이라고 농반진반의 자조를 하면서 ‘아버지 때는 식민지의 젊은이로 애족 항일의 차원에서 징병을 기피했고, 아들 때는 베트남전이 치열한 때여서 반전의 평화주의자로 병역을 기피했고, 손자 때는 통일시대이니 당연히 기피할 것’이라고 매맞아 죽기 딱 좋은 소리를 했는데 그야말로 청년기였던 70년대는 전 세계가 사회주의 공산국가를 빼놓고는 반전의 히피문화가 왕성하게 일어났던 시대였다. 전혀 전투적이 아닌 극단적인 평화주의자들, 어찌 보면 퇴폐적인 모습으로 비쳤겠지만 사실은 예술적이고 지적이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고급의 정신문화족들이었다.

그때는 많은 젊은이들이 사회 조직에서 되고 싶은 것보다 하고 싶은 것이 더 많았던 데 비해 지금은 이것이든 저것이든 오직 돈만 많이 생기면 최선의 가치를 부여하는 겁 없는 시대여서 나는 더욱 겁이 난다.

이장호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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