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TBC 방송국은 단 한 편의 드라마로 한국 대중문화의 물줄기를 크게 바꿔놓았다.
지금도 드라마 PD들이 “10년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히트작”이라고 평가하는 드라마. 바로 ‘아씨’였다. ‘아씨’에 이끌려 TV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당시 사람들은 이듬해 KBS에서 ‘여로’가 방영되자 TV에 눈과 귀를 온통 빼앗겨 버렸다.
영화계에 70년대는 암울한 시기였다. TV의 전국적인 보급과 유신 정권의 가혹한 검열은 영화계를 불황의 늪으로 밀어넣었다.
70년대를 말할 때 ‘통기타’라는 키워드가 자주 등장하는 데서 알 수 있듯 가요계는 70년대 초반까지 포크음악을 중심으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전성기를 누렸다.
▽대중을 사로잡은 바보상자〓‘아씨’는 KBS, TBC, MBC 등 3개 방송국 사이에 드라마 제작 경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여로’가 나온 71년까지만 해도 전국에 보급된 TV 수상기는 고작 62만대. 앞집, 옆집, 뒷집 사람들은 ‘여로’가 방영되는 시간이면 한 집에 모여 영구(장욱제)의 바보 연기와 분이(태현실)의 고단한 시집살이에 함께 울고 웃었다.
그 뒤로는 ‘가시리’ ‘신부들’ ‘파도’(KBS), ‘세자매’‘마부’(TBC), ‘정’ ‘학부인’ ‘여심’(MBC) 등 여성 취향의 드라마가 봇물을 이뤘다. 김희갑 황정순 최은희 황해 박노식 한혜숙 등이 당시 브라운관을 휘저은 스타들.
코미디쪽은 60년대의 스타 곽규석과 구봉서가 여전히 아성을 지키고 있었고 서영춘 배삼룡 이기동은 ‘저질 코미디’라는 일부의 비판에 상관없이 절대적인 인기를 누렸다.
“굳센 체력, 슬기로운 마음 명랑운동회 시간이 돌아왔습니다”라는 변웅전 아나운서(전 자민련 의원)의 멘트와 “쇼쇼∼쇼”를 외치던 허참 아나운서의 힘찬 목소리도 오랫동안 시청자의 귓전을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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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넓은 청바지에 통기타 둘러메고〓70년대 가요계는 포크음악의 전성 시대였다. 포크송은 단순한 장르 수준을 넘어 그 시절 젊은이들의 솔직하고 자유분방한 생각을 분출하는 도구로 자리매김했다. 나도 행복의 나라로 가고 싶다고 노래했고, 한 마리 예쁜 고래를 잡으러 동해바다로 떠나자고 외쳤다.
‘꽃반지 끼고’(은희) ‘친구’(김민기) ‘행복의 나라’(한대수) ‘작은 새’(김정호) ‘애인’(이장희) 등이 대표적인 포크계열 가요들.
한편에서는 미국 문화를 동경하던 젊은이들이 만들어낸 장르가 유행했다. ‘웨딩케익’ ‘아름다운 것들’ ‘고별’ 등 번안 가요와 ‘트윈폴리오’ ‘원플러스원’ ‘투코리안즈’ 등 외국어 이름의 팀들이 한 때를 풍미했다.
60년대 후반 신중현이 태동시킨 록음악은 70년대초 ‘해변으로 가요’(키보이스) ‘초원의 빛’(히식스) ‘등불’(영사운드) 등 그룹사운드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이어졌고 70년대 후반 대학가요제가 생기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75년 초 유명 가수들이 대거 연루된 대마초 파동은 포크음악을 급속도로 위축시켰다. 군부의 시퍼런 서슬 아래 김민기류의 노래들은 금지곡이 돼버렸다. 비판정신을 차단당한 음악인들은 70년대 후반 ‘푸른 시절’(김만수) ‘긴머리 소녀’(둘다섯) ‘어디쯤 가고있을까’(전영) 등 ‘무난한’ 포크송을 내놓았다. 포크가 주춤하는 사이 76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시작으로 그동안 포크에 눌려있던 트로트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비판 정신을 분출할 도구를 찾던 젊은이들은 민중가요라는 새로운 장르에서 탈출구를 찾았다. ‘해방가’ ‘농민가’ ‘훌라송’ ‘탄아탄아’와 같은 전래의 시위 노래와 기독교 운동권에서 들어온 ‘오 자유’ ‘우리의 믿음 치솟아’ 등을 비롯해 ‘영자송’ ‘고아’같은 구전가요가 대학가를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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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 가위에 난자당한 스크린〓유신정권은 73년 2월 16일 제4차 영화법 개정을 통해 검열 기준을 한층 강화하고 영화의 제작과 배급까지 모든 과정을 엄격히 통제했다. 자연히 시대적 리얼리티를 담은 영화는 나올 수 없었다.
영화인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관객을 끌어 들이기 위해 가벼운 주제의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60년대 말 제작됐다가 70년대 초 속편이 나온 ‘미워도 다시 한번’을 비롯해 최루성 멜로영화가 붐을 이뤘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
‘여고 졸업반’ ‘고교 얄개’ ‘모모는 철부지’ 같은 하이틴 영화도 붐을 이뤘다. 또 하나 주류를 형성했던 이야기는 ‘별들의 고향’ ‘영자의 전성시대’처럼 호스티스와 창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들. ‘별들의 고향’에서 주인공 경아는 경제 성장기 향락 소비문화의 희생자로 그려졌다.
암울하던 시기에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하길종 감독은 전위적인 작품 ‘화분’으로 당시 한국 영화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76년말에는 김청기감독이 ‘로보트 태권V’를 내놓으면서 어린이들을 극장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금동근기자 gold@donga.com
◆ 스포츠
프로 스포츠는 자본주의 스포츠의 꽃이다. 프로 스포츠가 발전하면서 국민의 삶은 재미를 더하게 됐고 스포츠를 통해 부(富)를 쌓는 선수도 탄생했다. 세계적 스타 박찬호 김병현 박세리 김미현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프로 스포츠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사랑 때문이었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활짝 꽃을 피운 한국의 프로스포츠는 이미 60, 70년대부터 서서히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김일 차범근 홍수환 등 이름만 들어도 아득한 흥분이 감도는 프로스포츠 스타들이 TV속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안방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칙칙한 흑백화면이었지만 쩌렁쩌렁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분위기를 잡는 데 한몫했다.
온 국민을 하나로 똘똘 뭉치게 만든 추억의 ‘영웅’들. 그들은 아직도 40, 50대 중년의 추억 한가운데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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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이노키는 공공의 적(敵)?〓2000년 3월 스포츠계는 한 거성(巨星)을 떠나보냈다. ‘박치기의 명수’ 김일(73)이 성대한 은퇴식과 함께 영원히 링을 떠난 것.
‘보디슬램’ ‘날개 꺾기’ ‘코브라 트위스트’ 등 상대의 쉴새 없는 공격으로 수세에 몰리다가도 박치기 한방으로 전세를 역전시키는 그를 영웅이라 부르기에 주저하는 이는 없었다. 지금은 절친한 친구가 된 일본의 라이벌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는 국민에게 ‘공공의 적’이었으며 이노키의 패배는 온 국민의 가슴을 후련하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김씨는 59년 일본에서 고(故) 역도산씨의 문하생으로 프로 레슬링 계에 입문한 뒤 70년대 중반까지 국내외에서 활약했다. 20여년의 선수생활 기간 동안 국내외에서 3000여회 경기를 가졌으며 70년에는 금산기지국 개국과 함께 그가 일본에서 가진 경기가 처음으로 위성 중계되기도 했다.
1989년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 지인(知人)들의 도움으로 투병생활을 해온 그는 은퇴를 앞두고 받은 체육훈장 맹호장으로 국민적 스타였음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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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신화, ‘4전5기’〓국내 스포츠계의 신화 가운데 빠질 수 없는 것이 홍수환의 ‘4전5기’ 신화. 77년 파나마에서 열렸던 WBA 주니어페더급 초대챔피언 결정전이었다. 홍수환은 네번이나 다운당하고도 강철같은 주먹을 휘둘러 ‘적’을 침몰시켰다. 그의 상대 카라스키야는 신화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당시 홍수환이 상대를 방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네번씩이나 쓰러지는 작전을 쓴 것이라는 말이 있었을 만큼 모든 국민은 그가 연출한 역전 드라마에 흠뻑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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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차붐’으로 코리아를 기억한다〓갈색폭격기 차범근. 그는 19세인 72년 국가대표에 발탁돼 국내 최고의 공격수 자리를 꿰찼다. 76년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서는 후반 종료 5분을 남기고 내리 3골을 넣으며 팀을 구해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79년 국내 축구선수로서는 처음으로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그는 프랑크푸르트팀의 공격수로 활약하며 80년 유럽축구연맹컵(UEFA) 우승을 일궈내 유럽에서 ‘차붐’ 선풍을 일으켰다. 88년에는 레버쿠젠의 유니폼을 입고 또 한번 UEFA컵을 손에 쥐는 등 독일에 있던 10년간 308 경기에서 98골을 기록해 외국선수로는 최고의 성적을 올렸다. 이 때문에 유럽의 축구 전문지와 관련 기관들은 아시아인으로는 유일하게 그를 ‘20세기 축구스타 100인’에 포함시키고 있다.
방송기술이 뒤처졌던 당시에는 그의 현란한 드리블과 골 장면을 감상할 수 없었지만 국내 팬들은 외신 등을 통해 그의 활약을 전해들으며 화제로 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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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의 스타들〓70년대 한국의 국가대표 농구팀은 아시아에서 ‘무적함대’로 통했다. 남자팀에는 백발백중의 슈터 신동파가, 여자팀에는 최고의 포인트가드 강현숙 등이 있었기 때문. 당시 동남아에서는 ‘박정희는 몰라도 신동파는 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신동파는 아시아 전역에서 스타대접을 받았다.
73년 4월 유고의 사라예보에서 날아든 승전보도 국민의 선잠을 깨운 낭보였다. 이에리사와 정현숙을 앞세운 한국 여자탁구팀은 루마니아와 서독 등 유럽의 강국을 잇달아 3-0으로 완파한 뒤 결승리그 마지막날 숙적 일본을 3-0으로 격파하고 구기종목으로는 처음으로 세계를 제패했다. 가장 큰 공을 세운 이에리사는 이후 ‘탁구의 마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박정훈기자 sunshad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