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박사는 연구에 몰두하느라 날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대덕연구단지는 자정만 되어도 뭐 좀 먹을 것을 사러 나가기가 여의치 않은 고립무원. 그러나 평소 간식거리를 준비하는 데 소홀한 강 박사.
“혹시 ‘기술도 식후 연구’란 말도 있던가요? 팀장이 배가 고파서 팀원들의 책상을 뒤져 몰래 컵 라면을 꺼내 먹었던 겁니다. 처음에는 의아해 했지만 결국 팀장의 소행임을 알고 이후부터는 컵라면이 절대 떨어지지 않도록 항상 한 박스를 재고로 유지했습니다.”(박주영 박사)
‘컵 라면 소동’이 발생하기 훨씬 전인 91년 6월 돌고래 쇼가 볼거리인 미국 샌디에이고. 강박사는 인터넷방송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당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선진 각국이 서로 인터넷방송 표준규격을 만들겠다고 덤비고 있었다. “인터넷방송이 뜰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 ‘분위기 파악차’ 참석했던 강 박사는 이때 막연하게만 파악하고 있던 글로벌 스탠더드의 중요성을 비로소 실감했다. ‘인터넷 방송 시장을 놓치지 않으려면 먼저 표준 규격 기술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귀국해 곧바로 작업에 뛰어들었지만 쉽지 않았다. 기존 기술에 일부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기술규격을 내놓는 일이어서 더욱 그랬다. 팀원들과 함께 짜여진 국제회의 일정에 맞춰 표준안 연구가 진행되지 않으면 며칠씩 밤을 새우는 것은 예사였다.
전자통신연구원에서 강 박사의 공간은 채 2평이 되지 않는다. 노트북 한 대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서류더미뿐인 곳이지만 여기서 그는 9명의 팀원과 함께 10년간 ‘글로벌 스탠더드’를 만들어 왔다. 그가 연구 개발한 ‘인터넷방송 멀티캐스팅기술’ 표준안이 지난해 국제 승인을 얻어 일단 고지 선점 전투에서 승리했다. 물론 시장에서 승리해 ‘사실상의 표준’으로 자리잡아야 하는 힘든 글로벌 전쟁을 남겨 놓고 있긴 하다.
2001년 9월 인도 방갈로르 윈저 셰러턴호텔. 국제전기통신연합 통신표준화부문(ITU-T) 총회장에 들어서는 강 박사 일행 다섯명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ITU-T는 세계 정보통신의 표준을 정하는 최고 권위의 국제기구다.
“긴장할 만도 했죠. 97년 12월 제안한 ‘인터넷방송 멀티캐스팅기술’ 표준안이 국제 승인을 받느냐 못받느냐가 판가름나는 최종 시험무대였으니까요. 더구나 한국이 표준 텍스트 전체를 독자적으로 개발해 국제 표준기구에 올린 경우는 그게 처음이었습니다.”
인터넷 이용자에겐 TV처럼 익숙해진 인터넷방송. 하지만 접속자가 많은 시간대면 화면이 뚝뚝 끊기거나 데이터가 중간에 날아가 짜증이 난다. 강 박사팀이 ITU-T에 내놓은 기술은 이처럼 불완전한 인터넷방송을 TV방송처럼 자연스럽게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인터넷의 종주국’인 미국에서조차 기술개발이 여의치 않아 제대로 된 표준규격을 여태껏 내놓지 못하고 있는 기술이다.
4일 동안 계속된 회의에서 영국 캐나다 이탈리아 등 참가 6개국 연구진은 강 박사팀에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이미 강 박사팀이 2년에 걸쳐 한국이 제안하는 표준규격 초안을 실제 인터넷을 통해 회원국에 구현해 보였지만 질문자들은 끝까지 강 박사팀을 물고 늘어졌다.
회의 마지막 날까지 강 박사팀을 옥죄던 참석자 전원은 마침내 강 박사팀의 표준안을 국제표준으로 권고하는 표시로 일제히 손을 들어올렸다. 순간 강 박사의 뇌리에는 지난 10년이 오버랩됐다.
“우선 후배들의 ‘컵라면’ 생각이 들었고…. 연구실에 혼자 남아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나, 남들처럼 가족하고 즐겁게 살 수도 있는데’ 하는 회의에 자주 빠졌습니다. 아내는 아예 절 내놓았어요. 늦게 집에 들어 올 거면 돈이나 많이 갖고 오라고 핀잔도 주었고요.”
돈은 무슨 돈? 그런 회의에 젖을 때마다 그를 다시 연구로 내몬 것은 ‘표준 전쟁’에서 골리앗으로 군림하는 미국이란 존재였다.
지난해 3월 강 박사는 초청받지도 않은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무작정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미네소타주 미니아폴리스에서 열리는 IETF(Internet Engineering Task Force) 연구그룹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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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ETF는 미국 민간기업 연구소 등이 주축이 된 연구집단. ‘TCP/IP’라는 인터넷 통신규격을 만들어 사실상 인터넷을 탄생시킨 IT업계의 거인이다. 최고 권위를 가진 국제전기통신연합이 표준으로 제정해도 ‘우리가 만들지 않으면 인터넷 표준이 아니다’라고 버틸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IETF를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IETF는 인터넷 방송 표준규격을 연구해온 한국을 줄곧 무시하다가 2000년에 뒤늦게 연구그룹을 만들었어요. 우리 팀은 이미 국제전기통신연합에 제안한 인터넷 방송기술을 IETF 규격에 반영해야 완전한 성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IETF 회의 때 발표 기회를 달라고 제안을 했죠.”
그러나 미국행 비행기가 뜰 때까지 초청장은 오지 않았다. 미국에 도착해서야 e메일로 온 답신을 확인했고 강 박사는 부랴부랴 IETF에서 발표할 수 있었다. 발표 현장에서 얻은 반응은 “훌륭한 기술이니 협의해서 함께 표준에 반영해 보자”는 긍정적인 것. 그러나 몇 달 뒤 IETF의 태도는 돌변했다. ‘이미 자체적으로 해당 기술을 개발했으니 한국의 기술은 반영하기 어렵다’는 답신이 날아왔다.
“인터넷분야의 표준 규격에서 미국의 ‘텃세’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미국 내 핵심그룹이 개발한 것이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죠.”
연구진은 스탠더드를 누가 정하느냐는 문제가 ‘국가적 자존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미국의 텃세에는 경제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산업자원부는 올 1월 인터넷 방송표준규격 기술이 본격 상용화될 2004년 이후 한국이 관련 응용 제품 수출을 통해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이 50억달러(6조5000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공식 추산했다. 하지만 50억달러는 승자의 몫이다. 국제기구가 인정한 국제표준이라 해도 시장에서 다른 표준을 받아들인다면 10년간의 연구결과는 물론 50억달러의 절반도 건지기 어렵게 된다. 최종 승자는 ‘스탠더드를 먼저 정한 나라’가 아니라 ‘스탠더드를 먼저 시장에서 쓰게 하는 나라’라는 것을 강 박사팀은 잘 알고 있다.
다행히 IETF가 표준규격을 내놓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다. 강 박사팀은 그래서 주어진 시간 동안 국제적으로 승인된 표준규격을 미국에 한발 앞서 사실상의 표준(de facto standard)으로 만들기 위해 일정을 서두르고 있다. 2월 말 하나로통신 등 인터넷서비스업체와 인터넷 방송솔루션개발업체 등 9개 업체를 불러모아 표준규격을 상용화하는 작업에 돌입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인터넷 보급률이 가장 높은 한국 시장에서 서비스가 검증된다면 세계 시장에서도 사실상의 표준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번 규격을 적용한 인터넷 방송을 올해 안에 국내에서 상용화한 뒤 또 다시 국제 표준으로 제안할 생각입니다.”
올 1월 10년간 공들인 작업으로 국제표준화기구(ISO)로부터 ‘최종적으로 국제규격으로 승인됐다’는 통보를 받은 강 박사. 그러나 “아직 절반도 못 왔다, 절반도…”라고 스스로를 다그친다.
▼국제표준 승인 한해 1500건…한국 주도로 따낸건 10건도 안돼
국제기구에서 한해 만들어지는 국제표준은 약 1500건. 하지만 지난해 인터넷동영상압축기술(MPEG)표준과 강신각 박사팀이 획득한 국제표준 등 한국이 주도해서 국제표준을 만든 사례는 아직까지 손에 꼽을 정도다.
산업자원부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여전히 국제표준화기구 회의가 100번 열리면 고작 다섯 번 정도 참가하는 나라.
국제전기통신연합 통신표준화부문(ITU-T) 산하 그룹에서 의장과 부의장, 프로젝트 책임자를 합한 의장단의 숫자에서도 미국, 일본, 영국 등에 크게 뒤져 있다.
하지만 올들어 정부와 민간기업들은 ‘스탠더드’ 잡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가장 주력하는 것은 정보통신부 주도로 이동통신 3사가 함께 추진중인 ‘무선 인터넷 플랫폼’ 사업. 이미 미국의 퀄컴과 선마이크로시스템즈, 일본의 NTT도코모가 자체 플랫폼을 내놓아 4파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일본과 함께 세계 무선인터넷인구의 93%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표준으로 밀고 갈 경우 승산이 있다는 계산이다. 정보통신부는 또 올들어 국제표준화 전문가를 150명 선정해 36억원을 지원하고 있다.
박현진 기자 witnes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