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양문명으로 재탄생하기 이전의 서유럽은 에게문명을 계승한 지중해문명으로 발전했다. 그것이 지구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는 듯한 형상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을 누르고 부상하리라고 예상할 수 있는 근거는 많지 않았다. 인구로만 보더라도 당시 세계인구의 반 이상은 아시아에, 약 4분의 1은 아메리카 대륙에 거주하고 있었다. 유럽 인구는 그보다 적은 5분의 1에 불과했다.
300여척의 배와 거의 3만명에 이르는 선원들, 그리고 로켓 병기까지 장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의 제독 정화(鄭和)가 이끄는 함대가 대서양이나 태평양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인도양 원정 이후인 1433년 해체됐던 것은 동서양문명사의 중요한 갈림길이 되고 말았다.
반면 단지 3척의 배로 이루어진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1492)과 연이은 바스코 다가마의 인도항로 개척(1496)은 새로운 문명적 표준을 탄생시킨 모멘트였다. 이들의 항해는 각기 대서양의 서쪽 끝과 남쪽 끝을 끌어들여 인문학적 의미의 대서양을 탄생시켰다. 자연적 의미의 대서양은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했지만, 그것은 아직 인간의 머리 속에 들어오지 못한, 따라서 지도 위에 그려지지 못한 바다였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의해 주도된 대서양의 인문적 탄생이란 십자군전쟁과 레콩키스타(이슬람세계에 점령당한 기독교 문화권의 땅을 되찾으려는 운동)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기독교 문명권에 의한 대서양의 지리적 포섭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콜럼버스와 바스코 다가마의 항해는 대서양에서 비서구인들의 무늬를 덮어버렸고, 하나의 줄기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서유럽이 지배 서사의 담당자(master-narrator)가 된 주요한 계기였다. 아울러 서부 아프리카 연안과 희망봉을 돌아 인도와 마카오, 티모르와 일본에까지 이르렀던 포르투갈인들의 선형제국은 베네치아와 제노바에서 출발하여 지중해를 건너 실크로드로 이어지는 유라시아 대륙 내부의 문명적 통로를 급격히 쇠퇴시켰다.
서유럽에 의한 대서양 표준 설정에 획을 그은 또 하나의 문명사적 사건은 1571년의 레판토 해전이다. 베네치아와 스페인의 연합함대가 오스만 투르크의 해양 진출을 지중해에서 막아낸 전투로서 기독교 문명권이 콘스탄티노플을 이슬람권에 빼앗긴 이후 118년 만에 벌인 설욕의 잔치였다. 레판토 해전은 기독교문명권의 이슬람문명권에 대한 해양적 우위를 과시한 사건으로서, 이슬람의 대서양 진출은 좌절된 반면 서유럽 국가들의 대서양 및 인도양 진출을 촉진시킨 계기였다.
레판토 해전이 이슬람적 표준과 기독교적 표준의 대결을 상징하는 것이었다면, 수에즈운하 건설의 배후에는 프랑스적 표준과 영국적 표준 간의 각축이 깔려 있었다. 1869년에 완성된 수에즈 운하는 지중해에서 홍해로 빠지는 통로를 건설하기 위한 것으로서 1798년에 있었던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그것은 대서양에서 영국이 누리고 있던 우위를 뒤엎기 위한 프랑스인들의 회심의 카드이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이 이집트의 공동지분을 인수함으로써 프랑스의 바람은 수포로 돌아갔다. 대신 유럽인들이 아시아로 가기 위해 대서양을 우회할 필요가 없어짐에 따라 과거 포르투갈에 의해 개척된 서부 아프리카 연안이 빠르게 몰락했다.
20세기에 들어설 무렵, 영국은 “파도를 지배한다”는 말로 해양을 통한 영국적 표준의 지배력을 과시했다. 지중해와 대서양, 홍해와 인도양에서 영국의 지위는 확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태평양은 아직 미결의 바다였다.
1905년 과거 포르투갈에 의해 개척된 해양항로를 따라 대한해협에 도달했던 러시아의 발틱함대는 일본 해군에 의해 대파되었다.
“쾌하도다 장하도다. 수백년 이래 행악하던 백인종의 선봉을 북 한 소리에 크게 부수었으니 가히 천고의 희한한 일이며 만방이 기념할 자취이다.” 이것은 당시 조선의 안중근이 내렸던 러일해전에 대한 문명사적 평가였다. 근대 중국의 아버지 쑨원도 유사한 평가를 내렸다.
“일본이 극동의 독립국이 됨에 따라, 모든 인민과 국가들은 그들의 독립을 위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 … 일본과 터키는 동쪽과 서쪽에 위치한 아시아의 방벽이다.”
그러나 대서양헌장에 맞서 태평양헌장을 만들기도 했던 일본은 결국 이런 아시아인들의 희망을 저버렸고, 새로운 문명적 표준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세계적 수준의 냉전과 한반도의 분단은 부단히 대서양문명의 표준에 자신을 맞춰온 쪽과 대륙적 표준에 집착했던 쪽의 승패를 명확히 갈랐다. 체코, 폴란드, 헝가리 등의 동유럽국가들은 한때 남한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앞서 있었지만, 남한을 자신들의 모델로 삼을 정도로 처지가 뒤바뀌고 말았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소련의 영향권 속에서 모스크바로 대표되는 표준을 따랐던 결과였다. 그렇다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미국의 영향권 속에서 워싱턴으로 대표되는 표준을 따랐던 나라들은 모두 승리했을까? 미국의 뒤뜰이라고 불렸던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중남미국가들이 보여주고 있는 최근의 모습들, 가장 세계화된 나라로 손꼽혔던 필리핀의 몰락은 대서양문명에 대한 승리주의적 열광을 경계하게 만든다.
실패한 대륙적 표준과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대서양적 표준. 그 사이에서 문명융합을 통한 새로운 표준을 지향하는 문명적 인터페이스로서 태평양이 열려 있는 것이다.
김명섭 한신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대서양문명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