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요즘 읽는 책]'민중자서전' '한국구비설화 전집'

  • 입력 2002년 3월 8일 17시 30분


□민중자서전

□한국구비설화 전집

걷는 것을 좋아한다. 쇠잔한 시골 마을 동구에 자동차를 세워 놓고 무턱대고 걷는다. 고샅도 감돌아들고 논틀밭틀 에돌면 그 곳에 사람이 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그들과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할매, 빨래하네. 안 춥은기요.” “와 안 춥구로. 아즉에는 얼음도 얼었띠라.” 며칠 전, 600년 묵은 매화인 정당매가 있는 운리에 가서 만났던 할머니에게 수작을 던졌다.

“할매는 어데서 시집 왔능기요.” “와. 그건 알아서 뭐 할라꼬. 내 친정은 바로 요 밑에 담배건조막 안 있더나. 그 집이라. 엎어지마 코 닿을 데라. 열 발자국도 안 되는 시집을 왔다 아이가. 가매도 못타고…” “뭐 그런 시집이 있능기요. 가매도 못 타고…. 신랑이 첫날밤에는 잘 해 주던기요.” “뭐이, 뭐라카노. 첫날밤. 숭하구로 그런 이야기는 와 묻는데.” “…” “호사시럽었제. 그런 날이 어데 또 있것나. 내 핑생에 없는 일이제.”

그날 그니는 결국 나에게 첫날밤 이야기를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난 평범한 우리 어른들이 살아 온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 속에는 모든 인문학 분야를 다 동원해야 겨우 낱낱이 분석할 수 있는 것들이 끝 모를 실 꾸러미처럼 담겨 있다. 그 지방의 말은 물론 삶에 대한 철학이며 생계기술, 생활습속, 생활경제, 관혼상제나 의식주에서 사회상, 역사적 사건까지 사람살이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그런 이야기들이 다소곳하게 펼쳐져 있는 책. ‘민중자서전’(뿌리깊은나무)은 내 책상에서 떠날 줄을 모르는 보물과도 같은 책이다.

언제나 손닿는 곳에 있어야 안심이 되는 또 하나의 책은 ‘한국구비설화 전집’(평민사)이다. 이젠 고인이 되신 임석재 선생이 평생을 두고 우리 땅을 다니며 듣고 모은 이야기들이 소담스럽게 펼쳐 있는 그 책은 같은 이야기이지만 앞의 책과는 또 다르다. 제목 탓인지 좀 무거운 내용이다 싶지만 막상 책장을 들춰보면 생각은 이내 바뀌고 만다. 툭툭 주고받거나 모깃불 피워 놓은 평상 위에서 나눴을 이야기들, 그 안에 우리 어른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들어앉았다. 그 마음은 자식들 교육으로 이어지는가 하면 한풀이로도 이어지고 우스개로도 이어진다. 그러나 그 끝에는 언제나 이 땅에 살아 간 사람들의 진한 모습이 드러난다.

이 책들을 읽으면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이야기꾼들에게 아주 강력하게 동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아무래도 디지털의 가녀린 동화력과는 다른 탓인 까닭이다. 발터 벤야민은 ‘복제기술(複製技術)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인쇄출판의 발달로 말미암은 대량복제의 시작으로 사라지고 마는 ‘이야기꾼’에 대해 경고한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산업화를 거쳐 정보화 시대로 끝없이 치닫고 있는 이때에 이젠 이미 없을지도 모르는 이 땅의 이야기꾼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탓에 난 걷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언제나 바람 부는 들녘에서 이야기 만나기를 기대하고 바람결에 실려 그 이야기들이 두고두고 이 땅 언저리에 남아 있기를 기대한다. 그것이야말로 가공되지 않은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이지누(계간 ‘디새집’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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