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사회과학고등교육원 자크 오몽 원장 인터뷰 전문

  • 입력 2002년 3월 10일 18시 35분


프랑스 영상문화계의 대표적인 학자인 자크 오몽 파리 사회과학고등교육원 원장과의 e메일 인터뷰를 통해 영화와 컴퓨터 게임을 비롯한 영상문화의 영향과 그 전망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인터뷰는 건국대 김동윤 교수가 맡았다.

-선생께서는 대단히 다양한 이론적 바탕을 가지고 영상학에 접근하는 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선 문화와 인류학의 관점에서 이미지 문명이 21세기에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해 총체적인 전망을 해 주시겠습니까?

"우리는 1980년대를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점점 더 풍성해진 시대로, 90년대를 PC의 시대로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90년대 PC의 시대에는 각 가정에 보급된 CD-Rom으로 인해 전대미문의 상상물이 각 가정에 전달됐고 사람들과 이미지와의 새로운 관계가 설정됐습니다. 모든 것이 시각적으로 나타나고 모습을 드러내는 세상의 유토피아를 실현했다는 느낌, 이는 흥분되는 동시에 두려운 느낌입니다. 오래 전부터 기다려왔던 이른바 '이미지 문명'이 마침내 도래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난 10년 사이 제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프랑스)에서 발견된 두 개의 기막힌 선사시대 동굴을 보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그 동굴들 내부는 탁월한 예술가 수준의 그림들로 치장돼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부터 사람들이 시각적 힘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으며 그 표현기술도 완벽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사회를 '이미지의 사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미지가 쉽게 만들어지고 조작되는 사회, 이미지를 제공하고 강요하는 사회환경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양적인 관점은 전망을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습니다. 그 양적인 관점에서만 볼 경우, 이미지가 대량으로 용이하게 만들어지기 이전에 오랫동안 이미지가 그 엄청난 내재적 힘으로 인해 다소 신성한(sacred)한 용도로만 사용돼 왔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됩니다. 가령 2만 년 전 석탄으로 호랑이를 그렸던 익명의 화가나 800년 전 하나님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벽화를 그렸던 화가는 자신이 그린 이미지를 늘 본 것이 아니라 종교적 제의 때만 볼 수 있었습니다. 이미지는 보편화되면서 신성한 성격과 함께 그 힘을 상실했습니다.

이미지가 신성을 상실하자 사람들은 이미지에 대해 대단히 친숙해졌습니다. 우리 세대 사람들이 겪은 가장 중요한 변화가 바로 '이미지 길들이기(domestication des images)'입니다. 이미지 길들이기 과정은 오랫동안 진행돼 왔습니다. 가령 자신의 얼굴을 남에게 그리게 하는 초상화는 이미지를 삶과 매우 근접시켰고, 사진기를 이용한 외모와 기계적 재생산은 이전에 이미지와 우리가 맺던 관계, 즉 모사(혹은 모방)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림이나 사진 이미지는 오랜 시간동안 (적어도 나의 부모세대까지) 하나의 사치로 여겨져 왔습니다. 오늘날 영화관 스크린, TV, 벽면 등 도처에 이미지가 널려 있습니다. 우리는 스크린과 함께 여행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지와 어떤 신비스런 관계도 갖지 않습니다. 우리와 이미지의 관계는 친숙한 것으로 변했고 완전히 세속화됐으며 이미지는 늘 함께 하는 벗이 됐습니다. 우리는 지금, 마치 고양이를 기르려고 사자 사육사가 될 필요가 없듯이, 이미지의 강한 마력을 새삼 느낄 필요도 없이 이미지들을 사방에 두고 살고 있습니다. 마치 가축이 된 동물처럼 이미지도 순치(馴致)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수수께끼와 매혹의 힘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모두 길들여진 상태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영화, TV, 사진, 광고, 컴퓨터 게임 등을 통해 온갖 이미지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깊은 의미'를 가진 문자 문화는 사라지게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이미지와 글이 어떤 방법으로든 '다시' 만나 상호보완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이미지가 범람한다고 해서 글의 문화가 고사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선사시대의 회화작품들은 인간(the Man)이 글 이전에 이미지를 발명했음을 알려 줍니다. 그러나 글은 사유(와 감정)의 표현에 필수불가결한 차원, 즉 분석적 차원을 제공해 왔습니다. 글은 사유와 감정의 표현에 필수불가결한 차원, 즉 분석적 차원을 제공합니다. 이미지는 문장이나 단어보다 더 즉각적인 파토스(pathos)의 힘을 갖고 있지만, 로고스(logos), 즉 언어와 이성 없이는 생각이나 사상을 정확히 전달할 수 없습니다. 과거 종교에서 보아 왔듯이, 이성적 관점에서는 약하지만 감성적으로는 매우 강력한 이미지와, 더 또렷하게 분절되지만 매력은 덜한 언어 사이의 해묵은 이분법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런데 말이나 글에 대한 이미지의 공격적인 태도는 점점 완화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1세기 전 입체파 화가들의 콜라주 기법에서 시작된 이미지와 언어의 결합 시도가 이제 정신의 기본적 활동을 자동적으로 재생산하는 PC의 발명으로 완성되고 있습니다. 자동성(automatisme)은 사진혁명에서도 핵심적이었던 것처럼, 이 경우에도 자동성이 핵심입니다. 글의 문화가 위협받기는커녕, 글의 문화에 새로운 기회, 즉 이미지 문화와 협동해서 함께 발전하는 기회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만화, 뮤직 클립, 인터랙티브 게임 등 대중문화영역에서 다소 충격적이고 잡종적인 이미지들로 나타납니다. 이미 작가주의 영화와 같은 현대 예술의 장에서 많은 예술가들이 그것을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는 매우 흥미로운 영화입니다. 그것은 문화적 퇴행현상이 결코 아닙니다. 대학의 영화학 교수인 저는 이미지, 특히 동적인 이미지가 사유의 도구로서 인정받게 된 것을 환영할 따름입니다."

-이미지가 주목받고 있음을 고려할 때 어린 시절부터 영상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만일 그렇다면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특히, 프랑스의 경우 영상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고 싶군요.

"프랑스에서 다소 체계적인 이미지 교육이 시작된 지 한 세대가 지났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이미 영화를 좋아하는 전통이 숙성됐고 그 덕분에 이미지 교육에서 장애물들이 어렵지 않게 극복됐습니다. 하지만 이미지 교육은 여전히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고 갈 길도 멉니다. 이미지 교육의 한계는, 무엇보다 지식 축적을 바탕으로 하는 문화를 제일 우선한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보다 효율적인 접근방법들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언어 이론만큼 정교한 이미지 이론의 정립도 중요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 이미지 이론은 언어이론 만큼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런 이론의 발전을 기다리면서, 이미지 제작에 대한 다양한 실천적 활동을 활성화하는 것 외에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먼저 이미지를 제작하는 실천적 활동이 활성화돼야 합니다. 말하면서 말을 배우고 글을 쓰면서 글쓰기를 배우며 악기를 연주하면서 음악을 배우는 것처럼, 이미지를 만들면서 이미지 만들기를 배울 수 있습니다.

폴라로이드(즉석사진기)나 비디오는 탁월한 도구들이지만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잘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인포그라피(infography) 도구도 매우 좋은 연장입니다. 이 도구는 학습과정에서 손으로 기계 조작을 숙련하는 과정을 줄이고, 특히 글과 함께 뒤엉켜 있는 이미지 그 자체에 자연스레 다가갈 수 있게 합니다. 프랑스 학교들은 차근차근 디지털 도구들을 갖춰 가고 있습니다. 1년 전부터 문화성은 여러 종류의 DVD를 교육현장의 교사들과 함께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저는 문화와 새로운 기법들을 연계하는 유용한 정책의 가능성을 보고 있습니다."

-이른바 '이미지의 시대'의 미래에는 가상현실에서 벌어지는 컴퓨터 게임이 더욱더 위세를 떨칠 전망입니다. 그리고 장차 컴퓨터 게임과 영화와의 만남과 같은 새로운 가능성도 조심스레 언급되고 있습니다. 인터랙티브 영화와 같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전망하시는지요?

"'인터랙티비티'(interactivity·온라인상의 쌍방향성)란 바로 관객의 이중적 태도가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 앞에 놓여진 허구적 세계 안에 기꺼이 들어가고, 어느 정도까지 그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전복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는 자유롭게 그것을 믿지 않고 거리를 두며 조종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온 라인 상의 인터랙티브 게임은 지금 현재 그런 가능성이 펼쳐질 수 있는 중요한 공간입니다. 인터랙티브 게임은 우리의 현실을 이중화시키는 헛된 환상의 세계를 구축하기 때문에 매력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절대적으로 독창적인 (그리고 매우 강한) 감각을 야기하기 때문에 매력적인 것입니다.

사회적 차원에서 볼 때 쌍방향 컴퓨터 게임은 마약을 대신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마약중독자가 헤로인에 집착하는 것처럼 컴퓨터에 '매달릴' 수 있고, 이는 가끔 마약처럼 심리적으로 파괴적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온라인 쌍방향 게임은 매우 빈곤한 상상적 세계를 생산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허구적 구축이 최대한도로 응축된 채 이를 크게 확대시킴으로서 감각적 충격을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파이널 판타지'와 같은 장편영화의 매력이나 유희의 세계를 잘 전위(transposition)시킨 '툼레이더(Tombraider)'의 기술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영화에서도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순수한 감각은 매우 개인적인 것인 반면, 연극의 먼 후손인 영화는 감정과 감동의 사회화라는 중요한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비록 20여 년 전부터 영화와 인터랙티비티의 결합을 꿈꾸었지만 그럴듯한 가시적인 결과는 거의 없었습니다. 동영상 이미지의 이러한 두 가지 방식(영화와 쌍방향 게임)은 사회적으로 엄연히 다릅니다. 이 둘은 각각 공공의 스펙타클 관객과 '사적인' 스펙타클 관객이라는 이분법적 구분 안에 남을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 매우 보기 좋고 흥미로운 잡종(하이브리드) 형태가 전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면에서 일본은 이미 25년 전부터 매우 창의적이고 자신만만한 애니메이션 산업과의 연계를 통해 앞서 가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만화' 스타일은 이미 국제적이 되었으며, 조형적 관점에서 이와 다른 여러 가지 흥미로운 시도들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할리우드영화가 세계 영화시장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합니다. 예술과 영화의 결합에 많은 관심을 가진 학자로서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신지 알고 싶습니다.

"영화는 이미지 대륙의 한 지방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매우 주목할 만한 영역입니다. (장 뤽 고다르를 인용한다면) 오직 영화만이 자신의 세기와 나란히 발맞추어 가며 자신의 세기(20세기)를 예술적, 미학적, 이데올로기적, 사회학적 그리고 정치적 차원 등 모든 차원에서 고루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20세기의 어떤 예술도 영화만큼 성찰이나 사유를 촉발시킨 적이 없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에 관해 말한다면, 저희 세대에게 할리우드 영화는 오랫동안 영화와 동의어였습니다. 각 나라에는 자국 영화가 있기 마련이지만 할리우드 영화는 자국에 국한된 국지적 영화가 아니라 보편적 영화, 즉 영화의 모델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할리우드는 스튜디오 시스템의 도입으로 경제적 기술적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효율적 모델을 구축했습니다. 그러나 매우 놀라운 것은 단지 경제적 기술적 면에서뿐만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거의 완벽한 모델을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입니다.

할리우드에서 영화인들이 다른 지역의 영화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할리우드 영화감독들은 어떤 개인적인 것을 표현하는데 최상의 위치에 있습니다. 산업적이고 상업적인 할리우드 영화는 가장 상업적인 영화가 예술적으로 풍부한 제약조건(제약 없이 예술이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과 만나는 모순된 면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이상의 것들은 1950년대 유럽 영화비평가들의 위대한 발견입니다.

그런데 할리우드의 이상적 이미지가 조금씩 퇴색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영향을 받았던 미국감독들은 시스템으로부터 점점 더 자유롭기를 원하고 개성을 내세우려 합니다."

-몇 년 전부터 한국영화가 자국 시장에서,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과 같은 외국 영화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겨루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지속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미국영화는 양적인 면과 기술적인 면에서 세계 정상이고, 스타들은 단순한 배우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미국적 상상물은 프랑스에서도 대다수의 청소년들에게 커다랗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아마도 저의 세대의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스필버그는 대상인(大商人)인 동시에 대중적 상상물을 잘 만들어내는 능숙한 제작자이고 때때로 영화감독으로서의 재능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의 영화 'A.I.'는 다소 실망스런 작품이었지만 '조스'는 하나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미국영화산업은 다른 영화들을 지배하려 했고 그 때문에 가장 우수한 영화인들을 끌어들여 자기들 출신 나라의 특성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직도 더 주목해서 지켜봐야 할 예로 홍콩영화의 대명사인 존 우나 제트 리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그 대가로 할리우드 영화산업은 영화의 명실상부한 고전적 모델을 구축했고 전 세계는 그 혜택을 입고 있기도 합니다. 전 세계의 TV 드라마에는 할리우드에서 만든 미학적 규범들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세계 도처의 작가주의 영화들이 기꺼이 1960년대 유럽의 누벨바그를 준거틀로 삼으려 한데 비해, 1959년 프랑스 누벨바그 제 1 차세대 감독들은 미국영화를 칭찬했고 미국영화에 대해 진 빚을 누차 밝힌 바 있습니다. 회화가 르네상스에 대한 빚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추상예술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 생각으로는 영화가 아직 할리우드가 만들어 놓은 고전적 규범에 등을 돌릴 만한 단계에 도달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달리 말해서, 영화라는 형태는 19세기 초 현대 소설의 발명으로 시작된 소설적 허구의 모험을 지속할 수 있는 (유일하게) 특권화된 공간으로 앞으로도 한참동안 남아 있을 것입니다. 브라이언 드팔마(Brian DePalma)에서 왕자웨이(Wong Kar-wai)에 이르는 개성이 강한 기교파 감독들, 그 충격적인 영상의 귀재들도 역시 커다란 이야기꾼들입니다.

새로운 이미지의 강력한 힘과 그에 대한 개인적 관심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래된 이야기 예술에 여전히 애착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조화로우면서도 매우 창의롭게 이미지(image)의 힘과 언어(verbe)의 힘을 결합시키는 이야기 예술입니다.

하지만 미국영화의 헤게모니와 지배는 예전과 같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우선 영화 제작의 국제화가 미국영화 자체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프랑스 기업 '비벤디'가 '유니버설'을 사들였다는 사실은 하나의 지엽적인 징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게다가 각 국의 자국 영화들이 예전보다 훨씬 더 잘 버텨주고 있습니다. 가령 '제 5원소'는 1997년 프랑스 영화가 해외시장에서 거둔 수익의 60%를 차지했고, 한국의 '쉬리'는 '타이타닉'의 흥행기록을 깼습니다. 물론 짧은 기간 동안 성공을 거둔 자국영화의 성과를 너무 과대평가하지는 말아야 하지만, 최근 추세는 자국영화 제작을 장려하는 분위기이고 주요한 제작의 거점들이 다원화되고 있습니다.

미국영화에 대한 자국영화의 저항은 인위적 감각의 세계와 (지금 영상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내게는 도래하지 않는) 현실세계, 이 둘을 혼동하지 않으려는 욕망이 발현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살아있는 자국영화들(포르투칼에서 구 소련 국가들에 이르는 국가들. 물론 한국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은 마음대로 변형할 수 없는, 보이는 세계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국영화들은 영화의 매우 오래된 이상, 즉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의 이상을 계승하는 영화들입니다.

특히 한국영화는 서유럽 국가 사람들, 적어도 영화애호가들로부터 각별한 주목을 받으면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2000년 가을 어느 미국대학에서 작은 한국영화 페스티벌에 참가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파리에서 본 바에 따르면, 2001년 6월 7일에서 7월 1일 사이에 파리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있었던 최근 임권택 감독 회고전의 상영관들은 늘 관람객들로 넘쳤습니다. 이 경우 '작가주의적' 현상이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프랑스 관객들은 사회참여적(앙가주망) 영화나 매우 개인적 시선으로 바라본 영화들을 보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일반적인 방식으로 극장에 나온 다른 영화들과 지난 가을 한국영화 페스티발에 출품된 영화들도, 물론 '엄청난 규모'의 상업 영화에는 비교할 수 없겠으나, 많은 관객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지역성을 각인한 자국영화들이 국제적으로 존재를 인정받는 일은 매우 가능하며 바람직한 일이기도 합니다. 다만 자국영화들의 존재가 (상업적으로) 지배적인 영화의 서열이 아닌 다른 기준에서 자리매김된다는 조건이 붙는 한 말입니다. 프랑스나 유럽의 경우, 주로 문화 TV 프로그램 시청자들로 구성되는 두터운 영화관객층이 존재하며 이들은 네오 할리우드류의 몇 번이고 재탕되는 허구영화와는 다른 영화들을 보고자 합니다. 바로 이러한 관객들을 겨냥해야 합니다. 이들의 취향은 단순합니다. 이들은 현실에 관해 말하는 영화들을 보려 합니다. 그 현실이 역사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아니면 지적, 예술적, 문화적인 것이든 말입니다.

프랑스 관객들이 좋아하는 한국영화들은 주로 한국이란 나라, 한국의 문화,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영화들입니다. 물론 피할 수 없는 이국적 취향 때문에 한국에 대해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가령 제 생각으로는 약간의 피상적인 '고어'(gore) 효과를 갖는 영화 '섬'은 다소 과장된 비평적 반응을 얻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영화가 프랑스 관객으로부터 '객관적으로' 평가받고 있을까요? 대답은 긍정적이기도 하고 부정적이기도 합니다. 긍정적인 부분은, 프랑스 관객들이 다른 나라에 비해 영화나 영화적 형식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고 이들은 영화를 통해 다른 나라들을 발견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부분은 한국은 자신이 갖고 있는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중국, 홍콩, 타이완, 일본 등 아시아 전체와 너무 자주 동일시되는 데서 비롯됩니다. 이들 나라들과 영화들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관객들은 멀리서 이들을 하나로 싸잡아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금년 월드컵 축구 개최가 프랑스인들의 한국에 대한 시각을 바꾸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아시아 영화 가운데 프랑스에서 영화 스크린에 가장 늦게 등장한 한국영화는 경쟁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급 영화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만일 현재의 상태가 더 공고해진다면, '한국영화'는 머지않아 지금의 '일본영화'나 '홍콩영화' 만큼이나 그 이름 자체가 독자적인 명칭이 될 것입니다."

-얼마 전부터 한국에서는 '반지의 제왕'과 같은 류의 판타지 영화가 크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에 매혹되고 열광하는 이유는 인간 상상력의 원형 격인 오래된 신화서사와 고도의 첨단 테크놀로지가 결합하는 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 경험을 이야기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경직된 틀에 갇히지 않고 너그러운 두 개의 다른 영화 에콜을 통해서 영화를 사랑하게 됐습니다. 첫 번째 에콜은 우선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였고 두 번째 에콜은 '카이에 뒤 시네마'였습니다. 앙리 랑글루와가 기획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예측하기 어려운 프로그램들을 통해서 저는 '영화'라는 것이, 시대나 국가, 경제 상황이나 제도에 따라 매우 다르고 많은 것들을 의미할 수 있다는 점을 배웠습니다. '카이에 뒤 시네마' 안에서 이루어진 토론을 통해 저는 영화에 대한 한 정의, 즉 '미장센'(la mise en scene)에 의해 영화를 정의하는 것이 다른 어떤 정의들 보다 더 매력적이란 점을 간파했습니다. 수수께끼 같은 이 미장센이라는 기준에 따르면 하워드 혹스(H. Hawks)의 작품은 '영화'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진네만(Zinneman:오스트리아계 미국 감독)이나 델머 데이브스(Delmer Daves) 작품은 완전히 그렇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많은 것을 요구하던 어린 시절, 영화의 은하계에는 너무 멀리서 빛나기 때문에 방문할 수 없는 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좀더 논의를 빠르게 진행한다면, 저는 어린시절의 꿈에 대한 디즈니의 독점적 헤게모니가 복잡하고 복합적인 스필버그(와 그 계승자들)의 헤게모니에 의해 대체되는 것을 경험한 세대의 사람입니다. 이 모든 것(스필버그 영화의 세계)은 우선 미국 땅에서 펼쳐졌고 멀게는 독일, 아일랜드, 스코트랜드, 유대의 땅 그리고 다소간은 이탈리아 땅에서도 펼쳐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초기 디즈니 영화사가 애호했던 커다란 테마들(백설공주, 피노키오, 피터 팬, 밤비)은 유럽 낭만주의 시대의 동화 세계로부터 직접 이어진 감수성(sensibility)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예술, 혹은 그의 재기가 빛나는 점은 무엇보다도 이런 감수성을 '새로운 옷', 즉 인공지능과 우주탐사의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게 했다는 부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로봇 어린이와 같은 'ET'는 동화의 세계 속에서 진화(evolution)하는데, 이 경우 동화의 세계는 역사나 과거, 박물관에 속한 것으로 환기되며 사용됩니다. (이런 점은 'A.I.'의 경우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바로 이런 틈새로 제작자들이 앞다투어 뛰어들었는데 이들은 이미 그 자체가 모작(패스티쉬·pastiche)인 작품들로부터 발견한 '광맥'을 잘 이용할 줄 알았습니다. 그 중 탁월한 예가 되는 J. R. R. 톨킨의 저작은 매우 풍부하고, 열정적이며 아주 잘 쓰여졌습니다. 그러나 그 작품인 '반지의 제왕'의 원래 계획은, 나치즘(사우론은 바로 히틀러)이라는 사악한 세력 때문에 아폴칼립스(apocalypse)적 상황에 직면한 1930년대 유럽에 대한 메타포를 표현하려 했습니다. 톨킨은 호빗 마을, 악마의 숲, 안개, 거인과 같은 것들을 만들어내면서 전통적인 동화의 세계를 극단적으로 모방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좋은 메뉴가 영화화되기 훨씬 전에 영화 못지 않은 성공을 거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사람들은 이 책이 지니는 시대적 맥락과 메타포의 측면을 쉽게 망각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조금의 존중도 없이 켈트의 아서왕과 성배의 세계를 취해 그것을 초시간적 가치와 차원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같은 해 또 다른 블록버스터인 '해리 포터'의 성공은 우선적으로 낭만적 상상물(판타스틱, 악의 현존, 초자연적 힘에 의한 희망)의 오래된 단골 메뉴들을 다시 오늘에 되살린 문학작품의 각색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디지털 이미지로 인해 가능해진 매우 정교하고 극단적인 특수효과도 영화의 신뢰성의 측면에서 크게 기여했습니다. 가령 사람들은 1930년대 '킹콩'의 특수효과보다 '반지의 제왕'의 특수효과를 훨씬 더 쉽게 '잊을' 것이고, 그 이유를 이미지의 유연한 흐름에서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공의 열쇠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여전히, 눈에 잘 띄는, 특수효과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관객의 쾌락을 결코 감소시키지는 않습니다. 저는 관객들이, 단지 현실의 헛된 미망(迷妄)인 환상을 원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관객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리의 허상(잘못된 생각)입니다. 관객의 즐거움은 언제나 그 반대로, 환상(illusion)과 그 환상에 대한 의식을 혼합하는 데서 옵니다. 특수효과를 쓰는 영화의 경우, 우리는 특별히 만족스런 상황 속에 놓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가 바로 눈앞에 대하고 있는 '불가능'의 이미지에다 우리를 내맡기면서, 동시에 안도감을 줄 수 있는 생각, 즉 '그것은 존재하지 않아, 그건 단지 꾸며낸 것일 뿐이야'라고 생각하는 상황입니다."

정리=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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