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2003년 가을 겨울 파리 프레타포르테의 가장 큰 테마는 ‘에스닉(ethnic·민속풍)’. 컬렉션에 참가한 거의 모든 디자이너들이 아시아, 아프리카인과 북미 인디언의 전통 의상에서 모티브를 딴 디자인을 대거 사용했다. 하지만 의상 자체에 정제되지 않은 야생적이고 거친 느낌을 불어넣기보다는 여성성을 강조해 로맨틱한 느낌을 준다. 플라스틱 등 의외의 소재를 사용하는 실험정신으로 ‘미래형 디자이너’로 꼽히던 후세인 살라얀이나 기하학적인 패턴을 즐겨 사용해온 장 폴 골티에도 에스닉 조류에 합류할 정도로 에스닉의 물결은 거세다. 하지만 5∼6년전의 차이나 칼라 열풍처럼 특정 국가의 전통적인 패션을 그대로 도입하기보다는 여러 문화의 민속적인 요소들을 이리저리 짜맞춘 ‘퓨전형 에스닉’임에 주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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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폴 골티에는 아프리카나 남미 고대 문명을 연상케 하는 복잡하고 규칙적인 프린트가 새겨진 의상을 선보였다. 화려한 장신구들과 함께 코디네이션해 한층 민속적인 느낌을 낸다. 외투처럼 입은 깨끗한 흰색 롱조끼는 복잡한 프린트를 깔끔하게 통일시키는 기능을 했다. 베트남 전통 모자를 연상시키는 머리 장식에 드리운 베일은 동양적인 신비감을 강조한다.
▶ 어느 나라의 정서를 모티브로 했는지 딱히 집어내기는 어렵지만 동양적인 신비함이 묻어있는 롱코트. 부드러운 모피가 가미돼 고급스러운 여성성을 강조한다. 인디언 처녀를 연상시키는 갈래머리도 돋보인다. 이 의상을 선보인 크리스티앙 라크르와는 프렌치 레이스 등 서양적인 디테일을 즐겨 써왔으나 이번 시즌을 계기로 동양적 에스닉에 도전했다.
# 데님
다양한 데님(denim) 소재, 즉 진(jeans)의 출현이 두드러졌다. 관객들은 “올 가을에는 멋진 진 하나는 장만해야겠다”고 두런거릴 정도였다. 진의 급부상은 사실 몇 해 전부터 예견돼 온 트렌드다. 뉴욕 컬렉션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미국 디자이너들이 대거 파리 패션계를 점령한 뒤 캐주얼을 미덕으로 삼는 전형적인 미국 패션 스타일 역시 파리 무대의 캣워크로 옮겨왔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올해는 요지 야마모토, 칼 라거펠트, 장 폴 골티에 등 스타일을 달리하는 디자이너들이 일제히 진을 소재로 써서 진의 강세가 절정에 이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올 가을, 겨울에 유행할 데님은 팬츠로든 재킷으로든 몸에 꼭 끼게 디자인돼 투박하거나 스포티하기보다는 섹시함을 강조한 스타일이다. ‘청바지+운동화’라는 공식을 깨고 하이힐과 함께 코디네이션된 것도 섹시 연출의 한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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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록한 허리선과 넓은 벨트 장식이 깜찍하면서도 현대적인 신세대 분위기를 내는 진 재킷. 골반 아래로 내려입게 되어 있으며 히프 부분의 볼륨감을 강조한 갈색 가죽 스커트와 어우러져 여성스러움을 극대화했다. 손가락까지 길게 내려 입는 터틀네크라인의 스웨터가 여유로운 느낌을 준다. 장 폴 골티에 작품.
▶ 칼 라거펠트는 직각에 가까운 각진 어깨가 돋보이는 깔끔한 재킷과 길고 슬림한 청바지로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청바지는 짙은 청색이 아닌 하늘색이라서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재킷 안에 받쳐 입은 셔츠, 긴 스카프, 하이힐은 모두 흰색으로 가녀리고 순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 1980’s
“80년대여 다시 한 번(Back to the 1980’s)!” 이번 봄, 여름 여성 패션의 코드로 예견된 ‘70년대풍’이 가을, 겨울에는 10년을 훌쩍 뛰어넘어 80년대로 이동할 가능성이 엿보인다. 80년대 패션의 주요 테마는 어깨를 강조하고 허리, 팔 등에 아기자기한 장식물을 많이 가미하는 것. 코트도 땅에 닿을 정도로 긴 디자인이 인기를 끌듯하다. 바지는 몸에 꼭 달라붙는 레깅스 스타일이 대거 선보일 전망이다. 80년대 패션으로 회귀하는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세계 각국의 경제성장이 본격화된 시기인 80년대의 풍요로움을 희구하는 심리가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갖가지 형태의 ‘벨트 패션’이 여러 디자이너들에 의해 선보였다는 것. 이 벨트들은 대부분 허리가 아닌 골반 부위에 느슨하게 걸쳐지는 스타일로 80년대 유행 패션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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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드를 넣은 듯 각지게 표현한 어깨선, 골반에 걸쳐입는 타이트한 가죽 팬츠가 80년대 분위기를 낸다. 최근까지 겨드랑이에 짧게 매는 것이 유행이었던 핸드백도 올 가을, 겨울에는 조금 더 늘어뜨려 매야할 듯하다. 팔에 잡힌 주름, 무릎 부분에 올록볼록하게 잡은 선 등 세부적인 요소까지 신경을 써서 전체적으로 풍성한 느낌을 주는 지방시 작품.
▶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차려입고 캠퍼스를 누볐던 트렌디한 여학생을 떠올리지 않을까. 길고 풍성한 질감의 터틀 니트 스웨터, 다리에 꼭 붙는 레깅스, 발목 위로 10㎝가량 올라가는 중간 길이 부츠, 낮게 골반 부위에 매는 벨트까지 80년대 멋쟁이 여성 패션 그대로다. 올 가을, 겨울에는 코트 길이도 한결 길어질 것으로 보인다. 지방시 작품.
# Blue, Black, Red
파리 프레타포르테 무대에 선 각국 디자이너들이 2002, 2003 가을 겨울의 주조색으로 내세운 컬러는 단연 블랙과 블루. 특히 멀리서 보면 검정으로 착각할 만큼 색이 짙어 ‘가짜 검은색(Mock Black)’이라 불리는 파란색을 애용하고 있다. 파란색과 검은색의 조화는 신비한 분위기와 함께 현대적인 요소를 더해 지방시, 칼 라거펠트 등의 의상을 빛냈다. 색상에 있어 또 하나의 트렌드는 포인트색으로 쓰인 빨간색의 물결. “지난해 미국 뉴욕 9·11 테러 이후 테러와 전쟁이라는 우울한 화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심리가 반영된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는 평론가들도 있다. 가을, 겨울의 가장 큰 트렌드로 꼽히는 에스닉한 의상들이 오렌지색, 와인색 등 대부분 화려한 붉은 톤을 사용하고 있어 빨간색은 포인트 컬러가 아닌 주조색의 하나로도 구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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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시가 선보인 짙은 파란색 재킷, 미니 스커트, 숄더백은 광택이 있는 가죽 소재로 만들어져 신비하고 현대적인 느낌을 연출한다. 올 가을, 겨울의 ‘모던함’이란 절제된 미니멀리즘을 뜻하지 않는다. 에스닉의 영향으로 옷 여기저기에 스티치를 넣어 거나 천의 재단법을 다양하게 해 오히려 다소 복잡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 포인트 컬러로 쓰인 빨간색은 특히 진과 궁합이 잘 맞는다. 세련된 진 원피스에 빨간색 모조 털재킷, 진분홍색의 롱부츠가 코디네이션 돼 보는 사람의 마음마저 경쾌하게 만들어준다. 이 작품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뿐만 아니라 존 갈리아노 등도 빨간색을 포인트 컬러로 사용하고 있다.
파리〓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