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은 2년 전에 만들어진다

  • 입력 2002년 3월 14일 15시 41분


옷이 매장에 진열되는 시점으로부터 최소한 2년 전, 국제유행색협회 위원회는 미래 패션에 적용될 유행색을 결정한다. 독일 베를린에 본부가 있는 국제유행색협회에는 전세계 패션관련회사 1만5000여개가 가입돼 있다. 이 중 최고결정권을 갖는 위원회는 15인 남짓으로 구성되며 각국 유행색협회의 추천을 받은 사람들이다. 원사(原絲)업체나 염료회사 관계자부터 디자이너까지 의류 제작의 단계별 전문가가 총망라된다.

이들은 각자의 감성과 시장 분석을 근거로 토의해 4, 5가지 메인 컬러를 결정한다. 이로부터 6개월 뒤 프랑스 파리의 ‘엑스포 필’ 등의 원사 전시회에서는 위원회에서 결정한 실의 유행색, 질감 등이 구체적인 실물로 선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패션회사 관계자들과 디자이너들이 바이어로서 가장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원사 전시회로부터 다시 6개월 후에 열리는 패브릭 전시회다. 특히 프랑스 파리의 패브릭 전시회 ‘프레미에 비종(Premiere Vision)’을 앞두고는 메카 성지(聖地) 순례에 나서는 무슬림들을 연상케 할 정도로 많은 패션 관계자들이 세계 각국에서 파리행 비행기에 오른다.

패브릭쇼에서 오가는 돈의 규모는 엄청나다. 실질적으로 패션이 구매, 산업과 결합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유럽산 직물 수출의 일등공신인 패브릭쇼의 축을 한국으로 끌어오겠다는 야심에서 출발한 국내 최대의 패브릭 전시회 ‘프리뷰 인 대구’(3월 13∼16일)의 성공 여부가 주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완성된 의상이 선보이는 각종 패션쇼가 가장 큰 관심거리다. 시장에 나오기 6개월 전 열리며 파리, 밀라노, 뉴욕, 런던, 도쿄 컬렉션이 세계 5대 쇼로 꼽힌다. 컬렉션 소식은 발빠른 패션 정보회사들과 인터넷에 힘입어 실시간으로 세계 각국으로 전해져 ‘유행의 글로벌화’를 가능케 한다.뉴욕이나 밀라노 컬렉션처럼 비즈니스 측면이 강화된 쇼의 경우 유행 트렌드로든 특정 제품의 카피로든 국내 패션에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의상의 경우 아르마니, 구치, 프라다처럼 점잖은 이탈리아 브랜드를 선호하는 까닭에 밀라노 컬렉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가방, 구두 등 소품류는 샤넬, 크리스티앙 디오르 등 파리 컬렉션에 서는 디자이너들의 작품이 선호된다. 국내 정서에 맞지 않는 디자인의 경우 아무리 해외 쇼에서 큰 호응을 얻었어도 국내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경우도 있다.

2년 전부터 기획돼 유행이 예측가능하지만 경제, 정치적 ‘돌발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변형, 재생산되는 경우도 많다. 한 예가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 아래 놓였던 97년으로 국내에서는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회색 옷 바탕 위에 화려한 코사지, 브로치, 반짝이는 큐빅 머리핀 등 소품류를 코디네이션하는 패션이 갑자기 붐을 이루었다.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지자 화려한 액세서리로 만족감을 얻으려는 보상심리 때문이었다.

왜 특정 국가에서 유행 지향적인 성향이 높은지 의상심리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여러 학설 가운데 하나가 가족 지향적인 사회일수록 유행을 따르는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동질감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는 분석이다. 뉴욕을 제쳐두면 파리가 패션의 근원지라고 알려져 있긴 하지만 현지 일반인들은 유행에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겨울, 유아부터 50대 이상에까지 더플코트가 남녀를 불문하고 크게 인기를 끌었다. 이같은 예를 개인주의가 뿌리내린 서양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영아

- 뉴욕FIT졸업 뉴저지주립대 마케팅 매니지먼트 석사

- 전 계명대 교수, 여자와닷컴 부사장

- 현 서울컬렉션 디렉터 및 패션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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