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있는 작품의 자료수집차 곧 일본으로 출국해요. 비워두는 기간동안 써야 할 글을 미리 써두느라 좀 무리했죠.”
한번 보겠느냐고 건네준 자필 원고는 듣던대로 해독할 수 없을 정도의 악필이었다.
70년대 ‘청년문화 기수’ 로 이름을 날린 지 30여년. 그가 ‘제2의 전성기’ 를 맞고 있다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많지 않다.
TV 드라마로도 방영되고 있는 장편소설 ‘상도(商道)’ 가 올 여름 300만부 판매기록을 깨면서 창작소설로는 ‘아버지’ 의 역대 최고기록을 깨뜨릴 전망이고, 그의 중단편을 모은 5권 분량의 전집이 조만간 문학동네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2년전 가톨릭신문에 연재했던 장편소설 ‘영혼의 새벽’ 도 4월말경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다.
국내 창작소설중 최고 베스트셀러 기록 돌파를 눈 앞에 두고 있는 ‘상도’ 에 대해 우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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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21세기의 화두죠. ‘상도’ 가 낙양의 지가를 올리면서 월급쟁이들이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가진다는 것이 동시대작가로서 너무나 고마워요. 누군가 ‘상도’ 가 이렇게 많이 팔리게 될 줄 짐작했느냐고 하던데 저로서는 솔직히 전혀 짐작도 못했어요. 링컨대통령이 그러지 않았어요? 적은 수의 사람은 일시적으로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오래 속일 수는 없다고.
원작과는 크게 다른 드라마 ‘상도’ (극본 정형우, 연출 이병훈)에 대해 원작자로서 불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발소에 가서도 “상도 잘 보고 있습니다” 란 인사를 받아요. 집사람과 함께 열심히 챙겨봅니다. 그런데 내가 대본을 쓰는 줄들 아나봐요. 원작이랑 다르다고 하는데 드라마는 소설과는 다른 장르잖아요. 드라마를 시작할 때 제작진은 원작의 30%만 반영하겠다고 했는데, 내가 볼 때 40% 이상 원작을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TV의 속성상 삼각관계, 러브스토리가 필요한 것 아닌가요? 난 ‘출가외인’ 에게는 신경쓰지 않아요. 제작진도 열심히 하고 반응도 좋다고 하니까 고마울 뿐이죠.
원작에는 없는 송상 대방 박주명(이순재)의 며느리 다녕(김현주)에 대해 그는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다녕이라는 인물은 원작의 ‘송이’ 를 대신하는 듯 해요. 송이는 원작에서 천주교에 귀의해 순교합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다녕이는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병훈 PD에게 살려달라고 부탁은 했는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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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 를 집필하면서 머릿속으로 그린 등장인물과 드라마 속의 인물을 비교하면서 아쉬움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손을 내저었다.
캐스팅은 전적으로 연출가의 몫이죠. 임상옥 역을 맡은 이재룡씨는 연기도 잘하고 외유내강 분위기로 점점 카리스마가 보이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그밖의 문학적 얘기로 화제를 가져가면서 1987년 가톨릭 귀의 후 ‘최인호 문학 2기’ 가 시작됐다는 평이 있다고 넌지시 물었다.
가톨릭 귀의 후 이어령 선생이 “넌 글 다 썼다” 라고 하셨어요. 작가가 종교에 빠지면 제대로 작품을 쓰기 어렵다는 말씀이셨지요. 인류의 역사가 주전, 주후(Before Christ, Anno Domini)로 나뉘듯 최인호의 역사도 신앙 전후로 나뉘는 것은 사실입니다. 신앙에의 귀의가 문학 속에 배어나와요. 성대수술을 했으면 목소리가 달라지는 것과 같은 것이죠. 나는 아직 위선자지만, 위선자가 글에 진정한 생명력을 실을 수 있나? 좋은 글을 쓰기 앞서 거짓없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요즈음 많이 하게 됩니다.
불교적 기독교인 이라고 생각해온 그는 내년 가을경 예수의 자취를 찾아 유럽 일대를 순례할 작정이다.
예수는 내게 너무나 매력적인 인물이예요. 3년 밖에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목수가 인류를 시종일관 들썩이게 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나요? 교조주의적이고 신학적인 예수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마태가 쓴 마태복음, 누가가 쓴 누가복음처럼 그 누구도 쓰지 않은 ‘최인호 복음’ 을 쓰고 싶어요. 3년간 여행하고 오려고 해요. ‘상도’ 로 돈 많이 벌었으니 그렇게 여행해도 괜찮아요(웃음). 아주 흥미진진할 것 같아요. 역사소설을 쓰면서 추적하는 노하우도 익혔고, 가톨릭주보에 묵상집을 연재하면서 내가 못할 분야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영혼의 새벽’ 은 그가 몹시 애착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영혼의 새벽’ 은 2년전 마무리했지만 좀 더 삭히자, 묵혀보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묵상이 덜된 부분이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지요. 6·25때 공산주의자들이 외국인 성직자들에게 강요한 ‘죽음의 행진’ 에서 살아남은 마리 마들렌이라는 시각장애 수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요. 남북갈등, 독재, 반체제간 갈등과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우리나라의 모습을 비춰보고자 했죠.
1994년 교통사고 이후 한동안 시달렸던 무기력증과 우울증을 운동과 등산으로 날려 버렸다는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청계산에 올라야할 시간” 이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2000년 가을 딸 다혜가 출산을 해 외할아버지가 됐고, 아들 도단이가 올해 그의 모교인 연세대에서 언론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S그룹에 입사했지만 그는 여전히 ‘청년’ 이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