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엄 촘스키 교수를 만나러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인천공항에서 뉴욕 케네디공항을 거쳐 보스턴공항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5차례나 보안검색을 당해야 했다. 외투와 신발을 벗어야 했고 마시던 물병의 마개를 열고 한 번 마셔보라는 요구까지 받았다. 짜증이 나 미국인 보안검색원에게 한마디했다.
“너무나 많은 게 변했군요.”
“이제는 예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거죠. 슬픈 일입니다.”
1년여 만에 다시 찾은 미국은 그렇게 변해 있었다. 9·11 테러의 충격과 상처는 밖에서 생각했던 이상으로 크고 선명했던 것이다.
보스턴시 헤이워드55에 위치한 촘스키 교수의 연구실에 도착한 것은 부슬비가 내리는 12일 오후였다. 연구실 문에는 버트런드 러셀의 대형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은회색의 덥수룩한 고수머리에 여윈 체격의 촘스키 교수가 러셀과 닮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러셀과 많이 닮아 보입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요.(웃음) 러셀은 편안한 영국신사 대신 고달픈 운동가의 길을 택한 사람입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아인슈타인은 오늘날 추앙받고 있지만 그는 사실 프린스턴대에 안락하게 파묻혀서 간혹 한마디씩 경고성 발언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러셀은 각종 정치적 사회적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고 애국심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케임브리지대에서 추방당하기도 했죠. 자신의 신념에 따라 희생을 감수하며 살았던 러셀을 개인적으로 존경합니다.”
-교수님 역시 과거 세금 반대 운동에 참여해 투옥되는 등 ‘행동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이런 활동 때문에 ‘무정부주의자’로 낙인찍히기도 했고요.
“저를 무정부주의자로 분류해도 무방할 겁니다. 제가 말하는 무정부주의의 뿌리는 모든 권력과 지배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권력과 지배가 정당하다면 이를 행사하는 이들이 그 정당성을 증명해야겠죠.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 권력 구조가 존재한다면 시민은 저항을 통해 변화를 꾀해야 합니다.”
-불법적인 저항도 가능하다는 얘기인가요.
“물론입니다. 지배구조는 개인의 관계,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 권력 구조와 지배에 도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불법적인 저항이 불가피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4세짜리 내 손녀가 자동차들이 마구 지나다니는 길로 뛰어들려 한다면 저는 할아버지로서의 권위를 내세워 이를 막으려 할 것입니다. 충분한 정당성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어떤 권력 구조든 붕괴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식 신자유주의, 보다 포괄적으로 말하면 세계화에 대한 저항도 필요하다는 말인가요.
“제가 세계화에 대한 저항에 앞장선다고들 하는데 이 말에 강한 반감을 느낍니다. 제가 왜 당신과 이 자리에 앉아 있다고 생각합니까. 또 왜 1월 브라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 참석해 여러 나라 사람들과 어울렸을까요. 저는 세계화를 주장하고 국제적 통합(international inte-gration)을 주장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세계화라고 믿습니다. ‘투자자의 권익’이라는 명분 아래 기업의 국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극소수의 권력층들이 ‘세계화’라는 단어를 훔쳐 그들만의 것으로 남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브라질의 세계사회포럼이 ‘반(反)세계화 포럼’으로 불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처럼 자원이 부족한 곳에서는 세계화, 좀 더 구체적으로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이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이념적 틀이 국제적 통합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한국이 아니라 한국민의 몫입니다. 투자자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기업들의 국제적 통합에 참여해 엄청난 물질적 특권을 누리는 소수의 사람들이 한국에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대다수 국민은 바로 이러한 특권에서 제외돼 왔습니다. 특히 97년 경제위기 이후 시장 개방으로 국민은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했습니다. 저는 한국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래서 개별적인 실천 방법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권력 기반은 의외로 약하다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세계 각국 국민이 연대를 통해 국가, 더 나아가 국제 정책의 방향을 조율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과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일부 심판의 고의 오심 의혹으로 한국에선 반미감정이 매우 높습니다.
“대다수 미국민도 정부 정책에 반감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감정과 아마 비슷할 것으로 믿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은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정 정책이나 결정에 대한 정당성을 개별적으로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지목했습니다. 교수님은 미국을 ‘악한 슈퍼 파워’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악한 슈퍼 파워’와 ‘악의 축’에서 악의 개념은 서로 다른 의미인가요.
“‘악’은 어린이들의 동화나 서사시에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이라크와 이란 북한은 각각 다른 이유로 인해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의 공식적인 적(敵)으로 선포됐습니다. 북한의 경우 이란과 이라크만 거론할 경우 이슬람권의 반발이 우려돼 포함됐습니다. 또 북한은 미국에 ‘저렴하고 편리한 적(cheap and convenient enemy)’이기 때문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적극적으로 북한을 옹호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미국은 알고 있습니다. ‘악의 축’ 발언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미국인들의 눈과 귀를 가리려는 데 있습니다. 미국이 ‘악한 슈퍼 파워’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라크의 경우를 봅시다. 미국은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이란과 전쟁 중인 이라크의 후세인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1988년 3월 이라크가 할라바 지역에서 쿠르드족에 대해 가스학살을 자행한 직후만 하더라도 미 행정부 내에서 이라크에 대해 군사공격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학살 주범에 대한 지원을 더 확대했습니다. 미 행정부의 위선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 정부의 ‘햇볕정책’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북한의 개방을 이끌어 내는 데 적절하다고 봅니다. 이 정책은 부시 행정부의 의도에 부딪혀 앞으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민이 끊임없이 이에 대한 지지와 의견을 개진한다면 햇볕정책의 성과가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동아일보 창간 82주년을 맞아 언론의 본분에 대해 한마디하신다면….
“진실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바로 진실이고 언론의 사명이자 기자로서의 명예를 지키는 무기라고 믿습니다.”
좀더 얘기하고 싶었으나 연구실 밖에는 워싱턴포스트 기자와 한 지역 방송사 기자가 다음 인터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념으로 가져간 한국의 양반탈 모형을 그에게 건넸더니 소년처럼 좋아했다. 봄비 그친 헤이워드가를 걸어 나오면서 문득 보스턴행 비행기 안에서 만났던 한 미국인 사업가의 말이 떠올랐다.
“보스턴에서 촘스키 교수는 그다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학자입니다. 학생들에게 세계를 지배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하버드 학자들이 더 인기가 있지요. 그러나 그는 저를 비롯한 많은 미국인들의 ‘영웅’입니다. 미국 사회에 단 하나 남았다고 해도 무방할 진정한 진보적 지식인이니까요. 그가 강연회를 열면 티켓이 하루 만에 매진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인터뷰〓김정안 국제부기자
▼촘스키는 누구▼
노엄 촘스키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교수(사진)는 언어철학자로서 셰익스피어, 마르크스와 함께 인문학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10대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가 과학과 심리학에 끼친 것과 비슷한 영향을 언어철학에 끼쳤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유대계 미국인으로 32세에 MIT 정교수 자리에 오르며 그의 천재성을 인정받은 촘스키 교수는 1964년 베트남전 징병을 거부하는 학생들을 지지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변형생성문법’으로 알려진 그의 언어이론이 1980년대 ‘지배-결속이론’으로 발전하면서 세계 언어학계를 사로잡고 있는 동안 그는 미국의 개입주의적 외교정책의 야만성을 신랄하게 폭로하는 등 지식인으로서의 발언을 계속해 왔다.
그의 관심은 미국의 외교정책과 언론에 대한 비판, 자본주의와 세계질서, 민주주의와 노동운동 분야 등으로 확장돼 왔으며 이런 점에서 ‘행동하는 지성’의 전형으로 꼽히기도 한다.
대표작으로는 ‘최소주의 언어이론’, ‘언어지식’ 등 언어학 분야의 연구서 외에 미국의 대외정책을 비판한 ‘숙명의 트라이앵글’, ‘불량국가’,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등이 있으며 70여권의 저서와 1000여편의 논문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