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기자의 현장칼럼]여자 법대생 피살사건 '들여다본 미궁'

  • 입력 2002년 3월 28일 15시 24분


최근 납치 살해된 여대생이 발견된 서울 근교의 한 등산로
최근 납치 살해된 여대생이 발견된 서울 근교의 한 등산로
미제사건으로 남은 1981년의 여대생 박상은양 피살사건. 이 사건을 떠오르게 하는 미모의 여대생 피살사건이 최근 발생했다. 사건 발생 20여일이 지나도록 수사당국은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 상태라 가족 등 주위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이 사건은 최초 수사단계에서 명문 법대 재학생과 이 단과대 출신의 젊은 판사, 변호사 등이 관련자로 등장하고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중견 기업체 대표의 사모님까지 거론되면서 한 시대의 세태를 보여주는 사건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경찰은 아직 이렇다 할 혐의자를 찾지 못한 채 수사는 짙은 안개 속을 헤매고 있다.

● 납치:CCTV의 남자들은 누구?

6일 수요일 새벽 5시반경.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다. 경칩인 이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모여대 법학과 4학년 D양(22)은 우산을 쓰고 집을 나섰다. 수요일은 수영하러 가는 날이다. 서울 강남에 있는 집에서 500m 정도 떨어진 4거리 근처 스포츠센터로 수영하러 다닌 지 3개월째. 척추에 이상이 있어 의사로부터 수영을 권유받았다. 수영반은 월·수·금반, 화·목·토반, 매일반으로 나뉘는데 그녀는 오전 6시 월·수·금반에 다니고 있었다. 2월까지만 해도 오전 6시 매일반에 다녔다. 그러나 3월부터는 수영장 가는 날을 반으로 줄였다. 3월은 1일(금)이 공휴일이어서 쉬고 4일(월) 처음으로 수영장에 나갔다. 6일은 이달 들어 두 번째로 수영장을 나가는 날. 납치범은 이날 정확하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집에서 스포츠센터까지 가는 길은 왕복 8차선 도로 옆 인도로, 통행량이 적은 새벽에는 자동차가 정차해도 될 만큼 공간이 충분하다. 게다가 새벽에는 인적이 드물다.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범인이 납치하기에 좋은 조건이었던 것 같다.

늦어도 아침 8시경이면 집으로 돌아오던 그녀가 돌아오지 않자 가족은 무슨 일인가 걱정이 됐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녀의 애인인 C씨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온 오후 1시반경. C씨는 오후 1시 그녀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연락이 없어 집으로 전화를 건 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경찰서 여성청소년계에 딸의 실종을 신고했다.

D양의 집이 있는 아파트는 한 동짜리. 지하주차장에서 나오는 입구에 CCTV가 있어 드나드는 차량의 사진을 24시간 찍고 있다. 아파트 출입구를 나서는 사람이나 차량 모두 CCTV에 찍히게 돼 있다. 그녀가 아파트를 나선 직후 수상한 남자 2명이 따라가는 모습이 흐릿하게 CCTV에 잡혔다. 그녀의 아버지는 8일 CCTV의 필름을 입수해 경찰서에 넘기고 사건을 형사계로 이첩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D양이 살았던 아파트는 35평형으로 시가는 3억8000만원 정도. D양의 아버지는 사업을 하고 있는데 부유층이라 하기는 어렵다. 납치범들은 그녀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금품 등을 요구하는 일반적인 납치사건이 아닌 것이 확실해져 갔다.

● 발견:총알 여섯발로 확인 사살

D양이 공기총을 맞은 사체로 발견된 것은 실종된 날로부터 열흘이 지난 16일 오전 9시경. 서울 올림픽대로를 타고 동쪽으로 끝까지 직진하다가 팔당대교로 진입하기 위해 U자로 도는 지점 근처의 검단산 자락에서다. 이곳은 팔당댐 방면 도로신설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원칙적으로 차량통행이 금지돼 있다. 공사가 진행되는 도로 아래로 한강을 바라보는 자리에 횟집들이 띄엄띄엄 들어서 있어 지나다니는 차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람이 많고 인적이 드문 장소여서 평소 이곳을 잘 알지 못하면 차로 선뜻 들어서기 어려운 장소다. 범인들은 공사 중인 도로를 따라 200m 정도 들어가 도로 우측 검단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에 사체를 버리고 달아났다.

이 여대생이 납치된 서울 강남의 현장에는 이 사건의 목격자를 찾는 전단이 붙어 있다

현재 이곳에는 15일 밤 10시에서 16일 새벽 5시 사이 총소리를 들은 사람을 찾는 경찰의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아직까지 총소리를 들었다고 경찰에 신고해 온 사람은 없다. D양은 다른 곳에서 살해된 후 이곳으로 옮겨졌을지도 모른다. 범인은 지름이 5mm인 탄환을 사용했다. 눈썹 위에 대고 발사한 최초의 1,2발이 치명상을 입혔을 것이 분명한데도 탄창에 들어있는 6발을 다 쏘며 잔인하게 확인사살을 했다. 그녀는 총에 맞기 전에 심하게 반항을 한 듯 왼쪽 팔이 세조각으로 부러져 있었다. 옷차림은 상당히 지저분해지긴 했지만 납치당할 때 그대로였고 속옷이나 양말도 마찬가지였다. 성폭행을 당한 흔적 등은 찾을 수 없었다. 범인은 마치 맡겨진 일만 완벽히 처리하는 데 온 신경을 기울인 듯 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결과 D양은 발견되기 1,2일전에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범인은 왜 1주일이 넘도록 D양을 끌고 다닌 걸까. 현장 수사진 중 일부는 D양의 식도나 위에서 음식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미뤄 납치된 직후 살해됐으며 사체가 추운 곳에서 보관됐다가 유기됐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 기록:변호사 판사와 법대생

D양은 수첩에 친구와의 약속 등을 꼼꼼히 기록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경찰은 가족으로부터 D양의 수첩들을 수사자료로 입수했다. 이 수첩에서 특히 일기처럼 양의 제한없이 기입할 수 있는 노트 부분에는 명문대 법대를 다니거나 졸업한 남자 3명의 이름과 이들과의 만남 등이 기록돼 있다. 수첩의 내용 중 대부분은 현재의 애인인 명문 법대 재학생 C씨와 언제 어디서 만나 무엇을 먹고 무엇을 했는지에 관한 기록이다.

두 사람은 그녀가 대학 1학년 때부터 사귀어 왔다.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지난 23일은 두 사람이 만난지 1000일째 되는 날이었다. 두 사람은 수도권에 집이 있는 C씨가 공부하기 위해 세를 얻어 살고 있는 대학 근처에서 주로 만났다. 대학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하고 극장에 영화도 보러 가고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근처 비디오방에서 노는 등 두 사람의 관계는 요즘 대학생 연인들의 관계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녀는 납치되기 이틀전인 4일에도 C씨를 만났고 6일에도 C씨와 만날 약속을 했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 냉각기도 있었다. 그녀는 간혹 C씨에 대해 ‘돈 씀씀이가 짜서 짜증이 난다’는 등의 불만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둘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졌다는 증거는 수첩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C씨는 D양이 실종된 당일 그녀의 가족에게 연락을 해 왔고 이후 D양의 시신이 발견되기 전까지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그녀를 찾아다녔다.

D양은 재작년 8월 C씨와 사이가 약간 틀어져 있는 동안 이종사촌인 판사 A씨의 소개로 A씨의 법대동기인 변호사 B씨와 잠시 만난 적이 있다. B씨는 당시 사법연수원에 다니고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두 사람은 4번 만난 것으로 나타났다. D양의 수첩에도 B씨가 잠깐 등장하는데 둘 사이의 관계는 D양이 B씨로부터 ‘바람을 맞았다’는 표현을 쓰면서 다소 싱겁게 끝나고 만다.

D양은 A씨와 만난다는 의심을 A씨의 장모로부터 받아왔다. 그러나 수사관계자는 “D양이 수첩에 애인인 C씨와의 관계는 은밀한 일까지 모조리 기록한 것과는 달리 A씨에 대해서는 간간히 부정적인 내용만을 기록한 것으로 미뤄 최근 몇 년 사이 A씨와 특별한 관계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현재 경찰이 확인한 사실은 그녀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A씨로부터 과외수업을 받았다는 것이 전부. 그럼에도 A씨의 장모는 D양과 A씨의 관계에 대해 의심을 품어 왔다.

D양의 수첩에는 그녀가 A씨의 장모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대목이 수차례 등장한다. D양의 같은 학교 친구 E양은 “그녀는 대체로 밝고 명랑했지만 간혹 이 문제로 괴로움을 호소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한번은 D양의 어머니가 A씨의 집을 찾아가 조카며느리가 되는 A씨의 부인에게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작년 A씨의 장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해 기소유예 처분과 접근금지 가처분결정을 받아냈다.

A씨의 부인은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지방 대기업체 사장의 딸이다. A씨와 A씨 부인은 중매로 결혼했다. 수사관계자는 “A씨는 장모와 D양의 가족이 벌이고 있는 갈등에서 중간에 낀 입장이었지 갈등의 원인제공자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한편 작년 D양이 여름방학을 맞아 고시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 기숙사에 들어갔을 때도 누군가가 기숙사 사무실에 수시로 전화를 걸어 D양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때로는 미행까지 했다. 그녀가 집에 있을 때도 이런 확인전화가 종종 걸려왔는데 그녀의 수첩에는 전화에 대고 ‘전화를 했으면 말을 해, 이 미친 X아!’라고 소리쳤다는 기록도 나온다.

● 수사:원한관계에 따른 청부살인?

사건을 맡고 있는 서울 강남경찰서와 경기 광주경찰서는 이번 사건이 일단 치정에서 빚어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D양은 죽는 날까지 C씨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B씨와는 잠시 만났다 헤어졌을 뿐이다, A씨에 대해서는 ‘성격이 찬 사람’이라는 등 좋지 않은 인상을 품고 있는 듯이 수첩에 적고 있다는 것이 이유다. 경찰은 “26일 현재 A씨와 B씨는 직접 찾아가서, C씨는 두차례 경찰로 불러 참고인 진술을 들었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제 치정이 아닌 원한관계 쪽으로 눈을 돌리고, 납치 및 살인 자체는 면식범이 아니라 청부업자들에 의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경찰은 드러나지 않은 원한관계가 또 있을 수 있다고 보고 휴대전화 추적 조사 등 광범위한 수사를 벌이고 있다.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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