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일기]언니야, 봄꽃 같던 일화언니야

  • 입력 2002년 3월 28일 16시 07분


하루가 다르게 남녘으로부터 봄소식이 전해져 온다. 아직 산 깊은 골짜기엔 얼음이 채 풀리지 않았건만 무엇이 그리도 성급했을까? 아니면 마냥 굼뜨기만 한 내 마음속의 어두운 그림자 때문일까? 이른 봄맞이가 조금은 어색하고 생경한 것이 두꺼운 겨울 흔적을 걷어내기엔 내 마음속에 아직 미흡함이 있어서인 듯하다.

이때쯤이면 가슴 한쪽으로 접어 두었던 아련한 추억이 조금씩 마음을 적셔온다.

꽃처럼 예쁘고 화사한 일화라는 이름을 가졌던 언니. 이제는 백일몽 같기도 한 내 어린 날의 흐린 기억들은 일화언니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내 고향은 경북 안동. 일화언니는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잠시 우리집에 와 있었던 먼 친척이었다.

유난히 병치레가 많았던 어린 시절 언니의 좁은 등에 업혀서 보냈던 따뜻하고 달콤했던 나날들. 수줍은 새싹들과 온몸을 감싸오던 상큼한 봄바람 속에 여린 봄꽃들이 다투어 피던 정감 어린 학굣길을 언니와 다정하게 손잡고 다녔던 길지 않은 시간들. 그때 행복했던 기억들이 내겐 얼마나 충만한 기쁨이었던가.

양지바른 들녘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며 한숨처럼 말하곤 하던 우수 어린 언니의 모습이 이따금씩 떠오른다.

“누가 뭐래도 니는 내 동생이데이, 알것제? 니는 공부도 많이 하고 우쨌거나 니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고, 훌륭한 사람 되그라. 내가 언제나 널 지켜 볼꺼구마. 니는 꼭 그렇게 살그라.”

의미도 모를 약속을 새끼손가락 걸어가며 수도 없이 했건만 언니는 얼마 후 채 스무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연지곤지 찍고 하염없이 눈물을 훔치며 우리가 함께 다녔던 그 길을 지나 먼 곳으로 시집을 갔다.

언니가 떠나 버린 후 한동안 외로운 가슴앓이로 몸져누웠던 내 어린 날의 스산함은 돌이켜보고 싶지 않은 회색빛 궤적이다.

그때처럼 여전히 무심한 꽃들은 피어나고 이른 봄바람이 취해버릴 만큼 향기로워,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금 이 자리에 섰는데 꽃같던 언니의 모습만은 보이질 않는다. 다만 애잔한 언니의 마지막 눈빛만이 따뜻한 향기가 되어 마음 깊이 되살아날 뿐이다.

이지수43·주부·서울 중랑구 상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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