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과 한-일관계' 작가 한수산-쓰시마 유코 船上대화

  • 입력 2002년 3월 31일 17시 58분


작가 한수산씨(왼쪽)와 쓰시마 유코.
작가 한수산씨(왼쪽)와 쓰시마 유코.
《세계인의 눈과 귀가 쏠리는 월드컵 공동개최로 한일관계에도 신시대가 예고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 문제 등 현안이 두 나라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여전히 벌려놓고 있다. 역사적으로 오랜 교류의 전통을 가져온 두 국민이 경계심과 반목을 허물고 지역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두 나라의 ‘광복세대’ ‘전후세대’를 각각 대변하는 46년생 한수산, 47년생 쓰시마 유코 두 작가가 3월 17일 후쿠오카∼부산을 오가는 쾌속선에 올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당초 계획과 달리 대담은 배를 내린 뒤에도 이어져 저녁 내내 계속됐다. 대담의 정리는 한수산씨가 맡았다. 상 하 두차례에 걸쳐 대담내용을 소개한다.》

동아국제마라톤이 시작되어, 1만2000의 건각들이 광화문을 출발하던 그날 아침 나는 일본의 작가 쓰시마 유코(津島佑子)를 만나기 위해 후쿠오카 공항에 내렸다. 공항에는 한글 안내문이 나붙고 한국어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TV에서는 동아마라톤의 전 레이스를 녹화방송하고 있었다.

‘아 이만큼 달라졌는가. 참 많이 가까워져 있는 게 아닌가.’ 일본이 한발 다가서는 느낌이었다. 가까운 나라라는 이 공간개념은 그러나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다음날 후쿠오카와 부산을 오가는 쾌속선 ‘비틀’을 타기 위해 부두로 나갔을 때였다. 대합실을 둘러보니, 안내판에 이상한 한글이 보였다. ‘택시 위의 타는 곳.’ 택시 타는 곳이라고 쓴다는 것이 어쩌다 이렇게 말이 안 되는 한글이 된 모양이었다. 일본에서는 한국인을 택시 지붕에 태우나. 그것은 한일간의 거리를 나타내는 어떤 지수(指數)처럼 느껴졌다.

“지금 하카다 항을 출발하고 있습니다. 부산항에는 3시 10분에 도착합니다. 현재 부산은 맑으며 기온은 15도입니다.”

얼굴도 옷차림도 너무 비슷하다. 누가 한국인이고 누가 일본인인지 구분이 안 된다. 그런 승객들로 가득 찬 배 안에 일본여성의 서툰 우리말 안내방송이 흐르고 있었다. 2m의 파고(波高)를 헤치며 배는 하카다 항을 뒤로 했다.

한수산〓축구장에가보신적이있습니까.

쓰시마 유코〓한두 번 있을까, 젊었을 때. 거의 없는 편입니다.

한큰일이군요. 축구장에도 안 가 본 분과 월드컵을 이야기해야 한다니. 〓한국에는 젊은 여성이 제일 싫어하는 남자가 군대 갔다온 이야기만 하는 남자, 축구 이야기만 하는 남자인데 그 중에도 제일 싫은 남자는 ‘군대가서 축구 하던 이야기’를 하는 남자라는 우스개가 있습니다.

쓰〓일본에서도 특히 ‘보통사람들’이 좋아하더군요.

한〓축구는 세계적으로 서민들이 즐기는 경기입니다. 스탠드에서의 불상사도 많고, 경기 중 내내 서서 응원을 하는 사람들도 축구경기의 서포터들입니다. 저는 이번의 공동개최가 두 나라의 ‘경쟁개최’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미 그런 과잉투자나 과공비례(過恭非禮)가 서로를 의식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쓰〓한국과 일본이 공동개최한다는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지요. 난동이나 테러 같은 게 없는 안전한 대회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은 두 나라가 같지 않나요? 각자의 문화가 존중되면서 공통점을 넓혀나가는 그런 국제화나 국제공헌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한〓월드컵 공동개최라는 인류의 축제를 앞두고 새로운 한일관계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아무리 부정한다 해도 우리들 사이에는 두 민족이 가진 과거라는 이름의 씻겨지지 않는 구원(舊怨)이 있습니다. 식민지 지배 후 반세기가 넘어가고 있지만, 아직도 일본의 식민지 시대에 대한 사죄 반성 보상이라는 문제가 휴화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청산을 요구하는 수요집회가 500회를 넘어서는 것을 보아야 하는 분노도 있었습니다. 왜 언제까지 한일관계는 이래야 하는 걸까요.

쓰〓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과거에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 문제에는 전후 일본이라는 나라의 시스템에 원인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전후 일본의 경제발전을 약속하고 그것을 실현한 사람들이 바로 전쟁으로 국가를 몰아간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이렇게 국가를 발전시켰으면 되는 것 아닌가’하며 자신을 정당화하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본인도 둘로 의견이 갈라져 있습니다. (과거사에 관해)일본도 다시 한번 고쳐 생각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이 계층은 권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이제까지 죽 그런 상태가 계속되어 왔지요. 일본의 경우 전쟁에 기여한 기업체가 바로 전후의 번영을 만든 사람들입니다. 전쟁 중에 득을 본 사람들이 전쟁이 끝나도 그 지위를 계속 유지했기 때문에, 과거가 깨끗하게 해결되지 않고 되풀이되는 겁니다.

한〓친일파 청산의 문제는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현실입니다. 그들이 건국의 중추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본인 가운데 조각가이자 시인인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郞)가 있습니다. 그는 천황과 전쟁을 찬양하는 시를 가장 많이 썼던 시인이지만 일본의 패전 후 동남아공영권이 허위였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역사관을 참회하며 산 속에 들어가 7년을 자영자급(自營自給)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참회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쓰〓저는 전쟁 후에 태어나서 그 역사를 모르고 자랐고 그 후에도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는 못하고 지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모른 체하고 잊어버리는 게 옳은 일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만 해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5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전에는 결코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 50년이라는 세월을 거쳐서 이제 공론화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50년이 지나서 이제야 그분들도 말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을 보면서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 아니다, 지금도 살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65년의 한일국교정상화 때 과거사를 청산하지 않고 그것을 쓰레기처럼 파묻고는 거기 물을 채우고 연못을 만든 꼴입니다. 가뭄이 들어 물이 마르면 쓰레기가 밖으로 드러납니다. 불쑥불쑥 ‘한일현안’이라고 튀어나오는 것이 그런 것들이지요.

쓰〓2000년 ‘일본군 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이 도쿄에서 열렸을 때입니다. 일본의 어느 방송이 그것을 녹화해서 방송할 예정이었으나 3일 전쯤 중요한 부분은 커트해 버리고, ‘일본은 아무 책임도 없다’는 부분을 새로 녹화해서 삽입 방송했습니다. 일본 우익으로부터 협박을 받고 그렇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최근 어떤 젊은 작가가 일본의 어두운 부분을 다룬 책을 썼는데, 그 책이 출판될 무렵 황태자가 아기를 갖자, 이런 시기에 그런 책을 내야 하느냐 해서 출판조차 되지 않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천황제(天皇制)를 비롯한 정치 종교 문제도 그렇습니다. 무언가 애매한 상태에서 전후 일본이란 나라의 틀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언론의 자유라는 중요한 것이 사라졌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이제 5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쓰〓우리들 나이의 작가가 이것저것 취재해서 잊혀지고 감춰진 것들을 들춰내서 써내고 있지 않습니까. 당대를 산 사람들 보다도 그 이후의 세대가 오히려 이런 일들을 해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제부터다’라는 생각에서 우리 세대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을 더 가슴 무겁게 느낍니다. 한국에도 제주도의 지나간 사건을 밝혀서 써내는 분이 있지 않습니까.

한=재일 한국인 문학가 중에도 ’화산도’를 쓴 김석범씨가 있지요. 그런 작업은 왜곡된 역사를 문학 안에 복원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옆에 쓰시마섬이 보인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때 쓰시마씨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쓰시마를 꼭 보고 싶었다고 했다. 비로소 나는 그녀의 이름이 한자만 다를 뿐 발음은 똑같이 쓰시마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이야기로는, 저 섬에 살던 조상 한 사람이 일본의 북쪽 아오모리로 이사를 해서 큰돈을 모은 후 쓰시마(對馬島)에서 쓰시마(津島)로 한자를 바꿨다는 것이었다.

그녀 옆으로 선조의 고향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니 우리가 탄 배가 그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한=한국인은 밥그릇을 놓고 먹고 일본인은 들고 먹습니다. 한국에서는 밥그릇을 들고 먹으면 ’너 거지냐’하고 나무랍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밥그릇을 놓고 먹으면 ’개처럼 먹지 말아’하고 야단을 칩니다.

쓰=저도 그 이야기를 듣고, 한국에 여행 왔을 때 밥그릇을 놓고 먹느라고 애 먹었습니다.

한〓우리는 보통 일본인의 장점으로 근면 청결 친절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저는 특히 일본인들이 자기 것을 갈고 닦는 정신을 좋아해서, 한중일(韓中日) 세 나라가 힘을 합쳐서 한국인은 창조력이 뛰어나니까 기획하고, 중국인은 유장(悠長)하니까 세월을 바쳐 만들고, 일본인은 그것을 잘 보존하면 참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쓰〓저는 한국인에게서 논리적(logical)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자신의 문화를 확실하고 논리적이며 자신 있게 내세운다는 거죠. 한국문학은 소설의 경우도 근대문학이라고 일컫는 것을 넘어서서, 길고 방대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거기에는 고전적인 것이 느껴집니다. 그건 참 부럽고, 일본문학에서는 남김없이 사라진 부분이거든요.

한〓제가 참 이해하기 힘든 일본인의 정서에는 자살이 있습니다. 죽음의 미학이니 하는 그 자살문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쓰〓일본의 헤이안시대의 글을 읽자면, 쉽게 자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후 무사(武士·사무라이)의 세계로 일본은 들어갑니다. ‘불명예보다는 죽음이 낫다’는 것이 그들의 생사관입니다. 그 후 이 무사의 문화, 그 정신이 일본의 것으로 자리잡습니다. 현대에 와서도 샐러리맨이 바로 무사입니다. 대기업에 소속되어 회사를 위해 살아갑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이라는 일본인이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만, 그것도 무사계급의 정신세계입니다. 이런 무사정신이 일본사회를 이끌게 된 거지요. 농민이나 어민이 자살하는 예가 없습니다.

한〓전직(轉職)을 쉽게 생각하는 요즘 세대의 의식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쓰〓지금은 많이 달라졌지요. 회사에 충성하는 남편과 자식 교육에 열심인 아내가 무사계급이지요. 젊은 세대를 보아도, 남자는 열심히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집안에서 아이를 돌보는 무사계급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여자가 일을 해야 하는 농어민의 문화는 아닙니다. 많은 일본의 농촌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샐러리맨이 된 것도 바로 무사지향의 정신이지요. 단순히 산업화의 영향만은 아닙니다.

나는 여기서 문득 쓰시마씨의 아버지 다자이 오사무(太帝治)를 떠올렸다. 명작 ‘샤요(斜陽)’의 작가, 수없이 많은 자살미수와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의 정사(情死)로 생을 끝낸 파란만장의 삶을 산 사람. 그녀가 한 살 때 아버지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정리〓한수산>

◆ 한수산(韓水山)

△1946년 강원도 춘천 출생

△경희대 영문과 졸업

△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사월의 끝’ 당선

△‘부초’로 77년 ‘오늘의작가상’ 수상

△사랑과 죽음 등 인간 보편의 문제를 감각적이고 유려한 문체로 형상화

◆ 쓰시마 유코(津島佑子)

△1947년 도쿄 출생

△시라유리(白百合)대 영문과 졸업

△대학 재학 중에 소설을 쓰기 시작, 69년 문단데뷔

△74년 ‘잡초의 어머니’로 ‘다무라 도시코 문학상’ 수상

△지적이며 서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사회성을 담은 작품을 주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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