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15시간이 걸리던 부산-후쿠오카 항로였다. 그러나 쓰시마씨와 내가 탄 배 비틀(Beetle)은 월남전에 투입된 제트기 엔진을 탑재한 초고속 여객선으로 3시간만에 현해탄을 넘었다. 비틀은 딱정벌레라는 그 이름이 의미하듯 작다. 정원 215명이다. 그러나 비틀이 동사가 되면 ‘빨리 간다’는 뜻이 되듯, 1분간 180톤의 물을 분사하여 그 추진력으로 4∼5m 물위를 날듯이 항해한다.
한수산〓한국 출판계에는 몇 가지 경이(驚異)가 있습니다. 대하소설이 읽히고 시집이 팔린다는 것인데…. 이건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현상입니다.
쓰시마 유코〓대단하군요. 일본은 책이 안 팔려 큰일입니다. 그렇게 많이 팔리던 만화도 안 팔립니다. 인터넷에서 영상물까지 PC가 그 영역을 넓히면서 젊은이들에게 책 읽을 시간이 없어졌습니다. 휴대전화도 그 원인의 하나입니다. 전화 요금이 너무 많아져서 책 살 용돈이 없답니다.
더욱이 팔리는 책과 팔리지 않는 책이 크게 양극화되어 버렸습니다. 그 원인의 하나가 출판사의 대형화에 있습니다. 대기업으로 성장한 출판사는 팔리는 책이 아니면 출판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중국을 모르면서도 중국의 문학을 읽으면서 우리가 중국을 이해하게 되는 것, 그런 것이 책의 힘인데 말입니다.
한〓일본의 경우, 문학잡지 편집자의 역할이 한국과는 다른 것으로 아는데요.
쓰시마〓제 경우 신인이었을 때, 편집자가 원고지 1000장의 작품을 놓고 반으로 줄여라, 이 문장은 고쳐라…. 그러면 눈물을 훔쳐가며 고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고치라고 해서 고치는 신인도 없고 편집자도 그런 힘이 없고….
한〓한국처럼 되었군요. 우리는 옛날부터 그랬습니다만. 이런 시대인데도, 소설 쓰고 싶다는 사람은 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국의 신춘문예 응모자는 해마다 늘고 있습니다.
쓰시마〓문학보다는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가 늘어난 것 아닐까요. ‘야오이 소설’이라고 아세요? 요즘 일본 젊은 세대가 쓰는 소설입니다. 특징은 ‘야마(山)가 없다. 오찌(落)가 없다. 이미(意味)가 없다’ 즉 클라이맥스도 없고, 엔딩도 없고 의미도 없는 소설 형태입니다. 매일매일 친구의 일기를 읽거나, 수다를 떨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책들입니다. 이것도 문학인가 생각하지만 내놓고 말했다간 ‘할머니’라고 욕할 테니….
그러나 저는 소설의 미래에 대하여 낙관적입니다. 변형은 있을 수 있겠지만, 이야기를 읽는 것을 좋아한다는 그 인간의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어떤 형태가 될지는 모르지만 ‘언어를 가지고 표현한 이야기’라는 형식으로서 문학은 그 마지막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불행한 역사를 가진 민족은 그것을 위대한 예술로 승화시킨다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한국보다는 해외진출이 빠른 일본문학 특히 노벨상 수상작가의 작품을 비롯해서 해외에 알려진 일본작가들의 작품이 일본 국내에서는 거의 읽히고 않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쓰시마〓‘일본의 독자를 위해 쓴 것이므로 번역하지 말아. 해외에 소개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본작가가 많습니다. 오에 겐사부로(大江建三郞)씨는 (독자로부터) 점점 더 외로워지겠지요. 차라리 노벨상을 받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혼자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한〓몇 년전 ‘고베(神戶) 소년A 사건’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일본의 사회문제는 한국과는 좀 다르고, 더 심각하다 저는 이렇게 보는데요.
(‘고베 소년A’ 사건은 중학생이 아무 이유 없이 초등학생 몇 명을 때려죽인 사건이다. 그중 한 시신은 목을 잘라 그 머리를 잘 씻어서 자신의 방 장롱에 넣어두고 며칠을 바라보곤 하다가, 초등학교 교문에 올려놓고 사라진 사건이었다. 3개월만에 체포된 후, 소년이 그 동안 쓴 일기가 도쿄대학 교양학부 학생들의 문장수준을 넘어서고 있다고 해서 또 한번 일본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쓰시마〓너무도 쉽게 사람을 죽이는 청소년 사건이 늘어나고 있어요. 더군다나 그 소년들이 잡히고 나서 ‘왜 사람은 죽이면 안 돼요?’ 하고 오히려 되묻는다는 겁니다. 상징적이긴 하지만, (패전 후)나라를 다시 세우고 경제발전을 하기 위해, 우수한 자와 열등한 사람을 차별하는, 장애가 있는 사람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교육 시스템이 만들어졌습니다. 사회란 여러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하는 의식이 없이, 시험과 성적만을 생각하며 자란 세대들에게 필연이 아닐까요.
(우수한 사람과 열등한 사람이) 분리(分離)될 수는 있겠지만 ‘오모이야리(남을 헤아려 생각하는 것)’가 없어진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자유 인권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있어 “시험만 잘 쳐! 시험!”하는 식의 교육에서 그런 것이 이루어질 수는 없었습니다.
일본의 경제발전은 낙오되는 사람, 약한 사람을 잘라내고(切) 떨어뜨리며(落)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잔혹한 일입니까. 그렇게 해서 풍요로 상징되는 3C의 시대(자동차, 에어콘, 냉장고를 가지는 시대)를 이룩했지만, 결국 인간성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요.
이날 파고는 2m였다. 미리 멀미약을 먹으면서 걱정을 한 그녀와는 달리 별 준비가 없었던 나는 2시간을 넘기면서,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어 배멀미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잠시 이야기를 멈췄다. 쓰시마씨에게서 멀미약을 받아먹고 얼마동안 진정을 하는 사이, 하나 둘 한국의 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파도도 가라앉아 있었다.
한〓저는 어려서 ‘인류는 형제다’라는 말을 들으며 참 이상했습니다. 기지촌을 오가는 백인병사와 내가 어떻게 형제일 수 있는가. ‘세계는 하나다’도 마찬가지지요. 유럽의 경제적 통합인 EU를 바라보면서, 아시아는 언제까지 이렇게 갈기갈기 찢어져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만….
쓰시마〓14억의 중국, 10억의 인도, 이런 인구로 어떻게 아시아가 하나가 될 수 있겠어요. 하나의 큰 흐름 안에서의 자국 문화를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어떤 원류에서 여러 나라로 흩어진 문화가 거기 정착해서 변화를 거듭하며 현재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 그 원형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문학의 경우에도 그것이 도쿄의 서점 서가에 꽂혀 있든 아니면 뉴욕의 어디에 있든.
요즈음의 국제화라는 것은 문학 예술이 아닌 경제와 상품의 문제 아닙니까. 일본의 자동판매기에서 미국담배가 팔리는 게 국제화입니까. 자연스럽게 국제교류가 이루어진다면 좋겠지만 컴퓨터가 상징하듯 영어화(英語化)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한〓제3세계의 문화의 깊이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서구를 모델로 했다는 것, 정형화되고 심메트리컬(대칭)한 것을 우수한 것으로 정의했다는 것은 모더니즘의 오류입니다. 월드컵을 계기로 우리는 세계의 많은 보통사람들, 결코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두 나라의 모습을 알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고유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일본이나 우리는 더 좀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세계최대의 해외원조국이 일본인데, 저는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조금 놀랐습니다.
쓰시마〓일본의 농업과 교육이 잘못되어 간 데도 무사계급의 도시유입 문제가 있습니다. 김도 야채도 조금씩 수입되기 시작한 것이…. 이젠 수입 농산물이 80%를 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비참한 기분이 듭니다. 이것까지 수입해서 먹어야 하나. 삶의 원전(原典)이 허물어진 것이지요. 역시 일본은 어딘가에서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그래서 하는 겁니다.
농업이 사라지고 어린이가 사라지고…. 어디가 어딘지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는 그런 상태가 아닌가. 정치는 나날이 저질이고, 외교는 그저 머리나 숙이는 게 좋다는 식이고. 이런 점은 일본만의 문제는 아닐 겁니다. 그래도 한국정치가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시대를 넘어 왔다는 의미에서.
(무슨 소리예요. 한국정치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러나 나는 이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고맙다고 말했다)
한〓세계적으로 알려진 일본의 전위무용 ‘부토(舞蹈)’ 공연을 고2 딸아이와 함께 간 적이 있습니다. 공연이 끝나자 딸아이가 토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얼굴을 하얗게 칠하고 가만히 서서 혀를 길게 늘어뜨리고 흔드는 춤도 있었거든요.
쓰시마〓결국 이웃 나라의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서울 정도로 어려운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한국영화 ‘쉬리’를 참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다만 저는 비쥬얼(visual) 쪽에는 관심이 없는 편입니다. 눈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우리들의 이 세계가 보이게 하는 것 그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 문학 아닙니까.
한〓한일 정상이 개폐회식에 참석할 예정입니다. 월드컵이 흔히 말하는 두 나라의 우호협력에도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하면서, 일본도 좋은 성적을 내기를 기원합니다.
부산항에 내려, 나와는 달리 외국인 입국 심사대를 거쳐 밖으로 나왔을 때도, 자동차 운전석이 일본과는 달리 반대라는 것을 보면서도 그녀는 외국에 왔다는 것을 실감하는 모습이었다. 대담을 끝낸 다음 날 부산을 떠나면서 그녀는 ‘게 김치’를 사고 싶다고 했다. 한국여행에서 딸이 사온 것을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다는 것이었다. ‘게 김치라니’ 나는 잠시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게를 김치에 넣는 풍습이 생겨났나. 그러나 알고 보니 그녀가 게김치라고 말했던 것은 게장이었다.
아주 행복한 얼굴이 되어 그녀는 빨간 게장 한 통과 구운 김을 샀다. 후쿠오카에서 돌아오는 내 가방에는 그곳에서 산 특유의 츠케모노(절인 야채)가 들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문화교류의 시작이 아닌가. 몇 천년 그 나라에서 산 사람들의 숨결이 스며 있는 음식문화, 그 가운데서도 일품인 한국의 게장과 일본의 츠케모노, 선상 대담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서로 나누어 가진 두 나라의 입맛이었다.
<정리〓한수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