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꽃신 신은 봄이 오른다 달이 뜨는 월출산에…

  • 입력 2002년 4월 2일 16시 54분


연출가 김정옥씨는 앞쪽 월출산은 요염한 여인 같고 뒤쪽 월출산은 너그러운 인상이라고 했다
연출가 김정옥씨는 앞쪽 월출산은 요염한 여인 같고 뒤쪽 월출산은 너그러운 인상이라고 했다

제대로 느껴 보지도 못하고 보낸 봄이 몇번이던가. 봄이 왔다기에 남으로 향했다. 광주발 직행버스 뒤쪽의 남녀 고등학생들이 킬킬거리는 소리에 잠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처녀 총각들이 정하게 가야제 시끄럽구먼” 하는 촌로의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든다. 벌써 전남 영암군 영암읍내. 봄기운을 잔뜩 인 월출산이 코앞에 솟아올라 있었다.

월출산은 계절에 따라, 또는 보는 방향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해발 809m로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사방 백리에 그만그만한 야산뿐이어서 영암땅 어디에서건 풍경의 주인이 된다.

남서쪽 끝 산봉우리 기슭에 자리한 도갑사부터 찾았다.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절앞의 동백은 산들산들 봄바람에 졸리는 듯 꽃잎을 떨군다. 대웅전 앞뜰 300년 된 석조(石槽)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조용하다. ‘석조’란 큰 돌의 내부를 파서 물을 담아 놓는 돌그릇. 화강암으로 만든 기다란 통나무배 같다. 갑자기 주위가 소란한 듯하더니 일군의 등산객이 석조 주위로 몰려와 목을 축인다. 아침에 천황사를 출발해 구름다리 바람폭포 천황봉 미왕재를 거쳐 하산했단다. 꼭 올라가야 맛인가. 도선국사의 업적을 소상히 기록한 도선수미비와 단아한 얼굴을 한 석조여래좌상을 둘러보며 고찰의 고즈넉한 여유를 즐기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도갑사를 나와 왕인박사유적지로 가자면 구림마을을 지난다. 남도의 전통가옥이며 황토 돌담길이 정겹다. 1600년 전 백제의 왕인박사가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갖고 일본으로 떠나면서 다시는 못 올 고향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는 돌정고개를 넘는다. 이 일대에서 6∼9일 왕인박사를 기리는 왕인문화축제가 펼쳐진다. 목포까지 이어지는 100리 벚꽃길은 벌써 하얗게 꽃을 피우고 관람객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월출산 도갑사

도갑사에서 만난 등산객들이 출발지로 삼은 천황사는 어떨까. 높은 산은 아니라지만 천황사쪽은 400m에 이르는 구불구불 돌계단만 밟아도 눈앞 기암절벽이 높이높이 날아오르는 느낌이 든다. 시간과 기력이 있으면 새벽 월출산에 올라 윤선도처럼 ‘월출산 높더니만 미운 것이 안개로다/천황 제일봉을 일시에 가리는구나 /두어라 해 퍼진 뒤면 안개 아니 걷히랴’고 호기라도 부려 보련만.

천황사는 없었다. 지난해 4월 불이 나 모두 타버렸고 거의 1년이 지난 아직까지 탄 내가 가시지 않는다. 일찌감치 하산해 월출산 온천에서 온천욕을 즐길 수도 있을 것 같다. 이곳 맥반석 온천수는 각종 무기질이 들어있어 피로회복과 피부질환 치료에 좋다는데. 밤이 되면 ‘달이 뜬다 달이 뜬다/월출산 천황봉에 보름달이 뜬다’고 노래한 하춘화의 영암아리랑을 흥얼거리기도 하면서.

그러나 내친김에 월출산 남동쪽 무위사까지 하루 일정 속에 넣어본다. 무위사는 영암군이 아니라 강진군에 자리하고 있다. 영암사람들은 영암군쪽 월출산을 앞산이라 하고 강진군쪽을 뒷산이라 부른다. 무위사까지 2차로 포장도로 양옆으로 차밭이 펼쳐진다. 월출산 강진다원. 진록색 융단을 깔아놓은 것 같다.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무위사는 벽화로 유명하다. 극락전은 벽에 29점의 탱화가 있었으나 지금은 본존불 뒤의 탱화만 남아있고 28점은 보존각에 있다. 봄바람에 흔들리는 보존각 풍경소리를 들으며 벽화들을 감상하는 맛이 제격이다. 법당이 완성된 뒤 찾아온 어느 노거사가 49일 동안 이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그렸다는 전설이 재미있다.

사찰에 싫증이 났다면 강진읍내에 있는 시인 김영랑(1903∼1950) 생가로 발길을 옮겨보자. 시인이 기다리던 모란은 아직 피지 않았지만 초가와 뒤뜰 동백꽃이 어우러져 봄의 흥취를 돋운다.

△ 여행 메모

서해안고속도로 종점인 목포에서 2번 국도를 타고 가다 819번 지방도로로 바꿔 타면 영암. 목포에서 승용차로 40분 거리. 광주나 목포에서 영암과 강진까지 수시로 직행버스가 다닌다. △27일에 등산하면 보름달을 볼 수 있지만 어르신들에겐 무리. 국립공원 월출산관리사무소 061-473-5210 △왕인문화축제 061-470-2350, www.wangin.org

영암·강진〓김진경기자 kjk9@donga.com

◆ 그곳에 가면-김정옥

월출산은 아름다운 산이다. 산세가 변화무쌍하고 그 선이 아름답다. 도선사가 유명하다. 앞쪽에서 본 월출산은 명성에 못지않게 스카이라인이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 때문에 요염한 여인처럼 위험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래서 악산(惡山)이라는 사람도 있다. 월출산의 뒤쪽은 다르다. 덤덤하고 원만하며 너그러운 인상마저 준다. 그 산기슭에 무위사(無爲寺)가 있다. 옛날에는 큰 사찰로 번창했지만 지금은 쇠락한 사찰이다. 찾아오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않고 그래서 섣부른 증개축을 하지 않아서 좋고 속세를 벗어난 오랜 시간이 거기 머물러 있는 것같이 느껴진다.

실제로 국보로 지정된 아름다운 고려시대의 벽화가 거기 있고 사찰이 모시는 불상같지 않은 돌로 된 민불(民佛)이 거기 있다. 고려벽화 민불과의 만남만 해도 엄청난 행운인데 남쪽을 향한 경내에는 언제나 온화한 햇살이 고여있어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고 너그럽게 만들어준다. 경 밖엔 차밭이 펼쳐진다. 맛있는 차가 재배될 수 있을 것 같은 향기로운 벌판이다.

거기서 15분만 가면 다산의 유적지가 있고 바다가 보이는 산사 백련사가 있다. 다시 강진시내로 들어가면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김영랑의 생가가 있다. 유서깊은 땅 아름답고 향기로운 고장으로 언제나 기억에 새롭다.

연출가·예술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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