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연분홍 진달래꽃이 필 때면 연분홍 티셔츠에 흰 바지, 흰 구두를 곱게 차려 입고 벚꽃으로 눈부신 안양CC를 지키고 있던 고 이병철 회장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이분과의 만남도 골프를 통해서이니 골프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참 좋은 운동이라는 생각이 새삼 든다.
골프의 불모지 시절부터 골프를 친구처럼 가까이 하며 골프에 대한 철학을 실천한 사람이 바로 이 회장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 경제계의 거물이자 동시에 골프계의 거목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골프에 대한 열정과 다방면에걸친 풍부한 지식으로 안양CC를 한국 최고의 골프장으로 만들었다. 안양CC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그의 손 때가 배지 않은 구석이 없다.
그가 안양CC에 새겨놓은 말 가운데 ‘무한추구(無限追球)’라는 말이 있다. 첫 홀에서 티샷을 한 뒤 페어웨이와 러프를 지나고 물을 건너면서 일희일비를 경험하며 작은 공 하나를 쫓아 18홀까지 이른다는 뜻이다. 이 글귀를 보면 찾을 구(求)자가 있어야할 자리에 공 구(球)자를 넣은 그의 재치에 무릎을 치게 된다.
이 회장은 옛것에 대한 식견도 높아 안양CC 클럽하우스에는 아주 오래된 골프클럽과 빛 바랜 공, 신발, 책 등이 잘 전시돼 있다.
그는 특히 가족과 함께 라운딩하는 것을 즐겨 주변 사람들에게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줬다. 홀인원을 3번이나 기록해 골퍼로서의 희열도 맛보았고 초창기 여자 프로들을 양성하는 등 골프계의 든든한 후견인 자리를 오랫동안 지켜줬다.
어느해 겨울 안양CC에 밤새도록 눈이 내려 휴장을 하게 됐는데 설경에 매료된 이 회장은 가까운 이들과 함께 18홀을 추운 줄도 모르고 돌았다. 타계하기 3개월 전 어느 날에는 투병중이면서도 밤늦게까지 라이트를 켜고 9홀을 돌 정도였으니 골프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
골프를 인생의 마지막 친구로 선택해 장수(長壽)가 아닌 장락(長樂)으로 삶을 마감한 이 회장은 멋진 골퍼로 한국골프사에 영원히 기억될 인물이다.
이순숙 월간 골프헤럴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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