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의 변천사]나이트클럽 학사주점 70년대에 급성장

  • 입력 2002년 4월 3일 17시 06분


70년대 이후 요정정치의 무대가 된 삼청각
70년대 이후 요정정치의 무대가 된 삼청각
‘붉고 파란 등불. 밝지 못한 샹들리에 아래 담배 연기 술 냄새를 재즈에 맞춰 춤추는 젊은 남녀의 옷깃이 소용돌이친다. 그 틈에 흘러나오는 여급의 목소리는 누님처럼 차분히 가라앉고 오히려 사나이들의 언행이 초조하고 격앙돼 있다.’

작가 김동환이 묘사한 1930년대의 카페 풍경이다.

우리나라에 술집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난 것은 고려 초기. 그 후 숱한 형태의 술집들이 등장하고 사라져갔다. 술집의 변천사는 생활사, 사회사에 다름 아니다.

옛날의 술집 하면 바로 연상되는 주막은 사실 조선시대 후기에야 생겨났다. 효종대에 화폐가 점차 유통되면서 장시(場市)가 번성하고 역참이라는 교통제도가 발달하면서다. 장시에 모여든 사람들이 화폐를 지불하고 음식을 먹고 잘 수 있는 곳이 필요했고 그래서 생겨난 것이 주막이다. 주막은 19세기 후반부터 전국의 교통요지 곳곳에 생겨났다.

조선 말기에는 술집의 형태가 좀더 다양화된다. 소매술집인 병주가, 소주를 만들어 판다 해서 소주가, 선술집인 목로주점 등 여러 형태의 술집들이 나타났다.

일제강점기 말 식량난으로 술이 귀했던 시절에는 ‘나라베(줄서기라는 뜻의 일본어)’ 술집이라고 해서 술을 배급하듯 팔기도 했다.

5·16 군사정권 이후 70년대 말까지는 요정의 전성기였다. 한말 궁중에서 퇴출당한 한 일급 요리사가 차린 명월관이 그 시초. 70년대 요정의 상징은 삼청각이었다. 박정희 정권 시대 많은 정치적 결정들이 이 삼청각의 밀실에서 이뤄졌다.

해방 이후 생겨난 포장마차는 80년대 초반까지 대표적인 서민주점이었다. 그러나 개발바람에 밀려 상당수의 포장마차촌이 사라졌고 지금은 종로 인사동 사당동 등에서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대폿집이라는 말이 쓰인 것도 해방 후다. 붉은 페인트로 왕대포라고 씌어진 창문이 달린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커다란 드럼통에 화덕을 만들고 연탄불을 피워 실내는 매캐한 냄새와 사람들의 입김으로 가득 차 있던 대폿집의 정경은 보기만 해도 훈훈했다.

자유부인들이 드나들던 카바레는 50년대 도시의 춤바람과 함께 번성했다.

70년대는 한국 경제의 도약기였을 뿐만 아니라 술집의 역사에서도 ‘팽창기’였다.

술집이 다양화되고 주머니 사정에 맞춰 계층화되기도 했다. 나이트클럽이 대중화된 것도 70년대. 40대 이상이면 기억할 ‘사랑과 평화’ 같은 밴드들이 나이트클럽에서 활동했다.

대폿집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학사주점. 7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생겨났다. 종로의 피맛골은 대표적인 학사주점 골목이다

2차 술집의 대명사인 룸살롱과 단란주점은 각각 70년대 말과 90년대에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명재 기자 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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