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중국요리 "연희동이냐 압구정동이냐"

  • 입력 2002년 4월 4일 14시 22분



●풍경 1-연희동 ‘안녕! 내 사랑. 하지만 난 영원히 당신을 잊지 못할 거예요∼♬.’ 트로트 같기도 하고, 애절한 발라드 같기도 하고, 중국에서 사후에도 계속 사랑받는 대만가수 ‘덩리쥔(鄧麗君)’의 노래 ‘너와 나’가 식당을 휘젓는다. 빨간색이라고만 하기엔 부족한,짙은 선홍색 벽지가 붙어 있고, 봉황을 담은 수묵화, 눈이 아플 지경으로 휘황찬란한 금술이 달린 용의 그림이 벽의 한 켠씩을 차지하고 있다. ‘신을 모신다’는 뜻의 제신(祭神)장식, 알록알록한 도자기도 빠지지 않는다. 종업원들끼리는 뜻 모를 중국어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생의흥륭(生意興隆)’ ‘초재진보(招財進寶)’ ‘공하신희(恭賀新禧)’ 등 건강과 재물운을 축수하는 뜻을 담은 붓글씨 액자도 군데군데 걸려 있다. 코에 묵직하게 걸린 향신료의 냄새는 빠져나갈 생각을 않는다. 최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생긴 중국음식점 진보(珍寶)와 걸리부(傑利富)를 비롯, 연희동과 마포구 연남동 일대의 진북경(眞北京) 매화(梅花) 흥복(興福) 육양(陸揚) 산동교자(山東餃子) 등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풍경이다.

●풍경 2-압구정동 미국이나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외카페처럼, 예쁘장한 보랏빛 차양이 식당 입구에 아담하게 들씌워져 있다. ‘Congee gogo’라는 영문 간판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한다. ‘콩쥐’ 같은 여자손님은 멀리 떠나라는 걸까. 이 집 종업원은 ‘칸지(congee의 중국어 발음)’가 중국말로 죽(粥)이며, 죽을 포함한 여러 가지 메뉴의 테이크 아웃이가능하다고 해서 ‘고고(gogo)’를 붙였다고 말한다. 저녁이 되면 이 곳은 중국음식점보다는 ‘차이나 바’라는 제목이 더 어울린다. 고량주 같은 중국술을 비롯해 30여종의 와인 샴페인 위스키가 팔리며, 팝과 재즈가 홀 안을 가득 메운다. 다음날 오전 4시까지 영업을 하기 때문에 밤이 늦도록 술잔을기울이는 사람들이 많다. 지하철 압구정역 부근만 해도 최근들어 생긴 ‘드 마리(De Marie)’를 비롯, ‘리포 홍콩(Lipo HongKong)’등 영문 간판을 내건 중국요리집이 인기를 누리고 있다. 청담동 부근에는 패밀리레스토랑 ‘엉클 웡스(Uncle Wang’s)’와 ‘미국식 중국요리’를 전면에 내세운 ‘홀리차우(Ho Lee Chow)’가 4, 5월 오픈을 목표로 공사 중이다. ‘이닝(Yining)’ ‘타이타닉(Titanic)’ 등 서양의 마을이름이나 영화이름으로 간판을 단 곳, ‘몬기(Mon Kee)’처럼 ‘차이니스 그릴(Chinese Grill)’이라는 간판을 붙여놓은 곳도 있다.

●中·美 전쟁

서울에서 연희동과 압구정동이 중국요리전문점의 양대 ‘지정학적 축’으로 떠올랐다. 중국과 미국의 대리전을 연상시키듯, 메뉴나 인테리어에 있어서도 ‘정통 본토 스타일’과 ‘아메리칸 스타일’로 맞서고 있다.

서대문구 연희동과 마포구 연남동 일대에 모여 있는 중국집들은 월드컵 때 몰려들 중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 또한 서울시 차원의 ‘리틀차이나 타운’ 조성 전략과 맞물려 수가 늘어나고 있다. 강남구 압구정동 청담동 신사동의 중국집들은 ‘자장면 짬뽕 탕수육’이라는 고답적인 중국음식 선택의 틀을 확장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음식평론가 이윤화씨는 “압구정동권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나 뉴욕의 ‘차이나타운’, 홍콩 등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식이 많이 도입됐다. 반면 연희동권은 기름기가 조금 적은 것을 제외하면 진짜 베이징이나 광둥지방 요리와 별 차이가 없는 듯 보인다”고 분석했다.

연희동권은 매운 맛을 잘 살리는 쓰촨(四川)식, 개운하고 향기로운 맛을 잘 내는 광둥(廣東)식과 베이징(北京) 스타일이 잘 접목돼 있다. 주인은 화교, 주방장은 본토에서 초빙한 진짜 중국인인 경우가 많다. 한국적인 양념이 주를 이뤘던 ‘코리안 차이니스 푸드’가 중국 현지인의 입맛에 조금 더 부응하는 ‘차이니스 푸드’로 바뀌는 중이다.

압구정동권에서는 젊은이들과 서양인 취향에 맞는 메뉴들이 개발되고 있다. 테이블에는 나이프, 포크가 젓가락과 함께 기본적으로 세팅돼 있다. 주방장으로는 한국인이 제일 많고 화교, 홍콩 출신, 중국본토 출신이 뒤를 잇는다. 레몬소스 생크림 등 서양요리에 많이 쓰이는 양념과 재료가 들어가지만 ‘퓨전’은 아니다. 압구정동권의 업주들은 “서양식 재료들이 자유롭게 접목되는 ‘상하이식 요리’일 따름이다. ‘퓨전’과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한다.

연희권 압구정권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퇴출되고 있는 메뉴는 ‘우동’이다. ‘흰 짬뽕’은 있을지언정 예전의 허여멀건한 국물에 해물과 면, 계란으로 맛을 냈던 우동국물은 대부분 사라졌다. 주방장들은 “일식우동에 자리를 내준 측면도 있지만, 매운 것 뿐만이 아니라 순한 것까지 짬뽕 국물이 다양화돼 우동의 대체재 역할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교자와 딤섬, 전통과 시장경제

만두는 두 권역의 차이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메뉴다. 연희동권의 ‘흥복(興福)’에서는 중국 출신 주방장이 중국교자(餃子)를 만들어 준다. 제사 지낼 때 먹는 빵인 ‘보어보어’, 생일 때 먹는 빵인 ‘서우타오’, 아침에 먹는 ‘떠우장’ 등 종류와 각각의 의미도 다양하며 한국만두보다 대체로 덩치가 크다. ‘빠오스’처럼 햄버거보다 큰 사이즈의 만두도 있을 정도. 만두소로는 고기 야채 생선이 들어가는데, 재료 특유의 비린내는 향신료와 반죽에 의해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촉감과 맛이 창조된다.

한편 압구정동권의 ‘리포홍콩’은 딤섬(點心)을 전문으로 한다. 홍콩 출신의 주방장이 일식집의 ‘스시’처럼 새우 해삼 시금치 쇠고기완자를 얹은 것을 비롯해 40여종의 다양한 딤섬요리를 만든다. ‘흰꽁치딤섬’ ‘닭발딤섬’까지 보면 ‘속을 채운 만두’에 대한 고정관념은 깨진다. 회전초밥집에서 기호에 따라 초밥을 고르듯 딤섬 몇 종류를 섞어 고를 수 있다. 인근 빌딩가의 외국계 기업체에 근무하는 다국적 샐러리맨들이 즐겨 찾는 간편식이다.

연희동권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메뉴지만 손님들이 맛보지 못했던 ‘본토의 맛’을 가르쳐 준다. 연희동권의 ‘걸리부(傑利富)’에서는 ‘가상화과(家常火鍋)’라는 중국식 샤브샤브요리를 한다. 새우완자 오징어완자 닭고기완자를 넣고 버섯 채소와 함께 익혀 먹는 것으로, 보통 맛볼 수 있는 샤브샤브보다 국물 맛이 진하다.

‘매화(梅花)’에서는 자장면이나 기스면보다 조금 진화된 실고기자장면 수초면을 팔고, ‘진북경(眞北京)’에서는 ‘맛탕’으로 알려진 감채류의 원재료를 고구마뿐만 아니라 옥수수 은행 바나나 호두까지 다변화했다.

‘루루’에서는 계피 정향 향초 진피 팔각 등의 향신료와 한약재를 섞어 만든 ‘칭자오 우육탕면’을 파는데, 독특한 향과 생소한 국물 맛에 매료된다.

이과 비교해 압구정동권은 소비자의 변화된 니즈(needs)를 꼼꼼히 챙겨 발빠르게 대응한다. 외식을 하는 소비자들의 입맛은 한식 뿐만 아니라 미국식, 이탈리아음식, 일식에도 길들여져 있는 것에 주목해 이를 두루 맞춰준다. 외식하며 건강까지 챙기는 심리도 고려한다.

압구정동권의 ‘현경’에서는 스파게티처럼 가공한 ‘볶음짬뽕면’이 인기메뉴다. 국물이 없어 토마토 스파게티와 외관으로는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건강메뉴’도 눈에 띈다.

‘이닝’에서는 기름기를 쏙 뺀 ‘맥반석닭고기’를, ‘리안’에서는 ‘동충하초상어지느러미찜’을 판다. 또 ‘야얀’에서는 클로렐라로 만들어진 면을 자장면의 면으로 사용한다. ‘칸지고고’에서는 ‘호두꿀새우’ ‘고구마샐러드’ ‘과일즙에 절인 연뿌리’ 등 다이어트용의 미국식 샐러드를 연상시키는 메뉴를 중국식으로 가공했다.

조인직 기자 cij19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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