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면은 언제, 어디서, 누가 먹기 시작했을까?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과 명성황후가 정치적 갈등을 빚으면서 명성황후 측은 청나라에 지원병을 요청했었다. 이 때 조선에 온 청나라 군인과 상인들,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에 참여했던 중국 노동자들이 간편하게 한끼를 때울 수 있는 음식으로 자장면을 먹기 시작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당시 조선에 온 사람 중 95%가 산둥(山東)성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산둥성은 우리가 자장면 만들 때 쓰는 춘장과 유사한 톈g(甛麵)장 등 장(醬)류가 발달한 지역이다. 따라서 장을 이용한 요리가 다양한데 그중 한가지가 ‘튀긴(炸·자) 장(醬·장)으로 만든 국수(麵·g)’, 즉 자장면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장면 등 한국에 유입된 현대 중국음식의 역사는 조선에 온 중국인 노동자들로부터 시작됐다고 유추할 수 있으며 뿌리 내린 지 한 세기가 훨씬 지난 셈이다.
청이라는 대국의 힘 때문이었을까. 현대 중국음식의 도입 초기에는 요리를 즐기는 것 자체가 ‘권력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끝난 뒤부터는 계층과 상관없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외식’으로 자리잡게 됐다. 서민은 자장면만 먹으면 되고, 상류층은 팔보채와 라조기를 먹으면 됐기 때문이다.
1970년대 한국정부의 화교정책 변화로 많은 화교들이 한국을 떠날 때 장안의 화제는 ‘삼선 누룽지탕’이었다.
기름에 튀긴 누룽지에 해물로 만든 수프를 부으면 그 소리가 커서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 같았다. 중일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했던 중국인들은 이 요리를 ‘도쿄폭격’이라고 불렀다. 누룽지탕에 소스를 부을 때 나는 소리에서 도쿄에 폭탄을 쏟아붓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싶었나 보다. 이로 미루어 보면 한국에서 다시 태어난 ‘삼선 누룽지탕’은 차별 받았다고 생각하는 화교들의 한 맺힌 소리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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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엔 중국음식점에서나 먹을 수 있었던 중국요리가 일반 가정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중국요리만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학원이 등장했고, ‘가정요리’ 같은 TV프로그램에서도 자주 중국요리 만들기가 방영되어 자장면과 짬뽕을 집에서 즐기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1992년 중국과 수교 후 중국요리에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이금기 소스’ 등 다양한 소스가 정식 수입되었다. 이금기 소스는 중국요리에 들어가는 기본 양념을 소스로 만든 것으로 현재 중국은 전 세계 60여개국에 이 소스를 수출하고 있다. 처음 중국 현지의 소스가 들어왔을 때, 굴의 농축액으로 만든 ‘굴기름’을 ‘들기름’으로 잘못 알아들어 들기름을 넣고 요리한 주부도 있었으니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과세’를 톡톡히 치른 셈이다.
90년대 후반 이후의 특징은 ‘홍콩바람’이었다. 홍콩의 맛 그대로 서울에 ‘딤섬’(홍콩에서 차와 함께 즐기는 만두류)을 가져왔으니 평소 다양한 중국음식을 맛보고 싶어했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20년 전만 해도 중국음식점을 찾는 손님들은 “이 집 주방장 화교예요”라고 물었다. 한국사람이 만드는 요리보다 화교 주방장이 만드는 요리가 더 맛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국과 수교한 지 10년 세월이 흐른 지금은 “이 집 주방장은 어떤 분이에요”라고 묻는다. 조리사의 출신이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조리사가 화교일 수도 있고, 중국에서 온 한족(漢族)일 수도 있고, 혹은 조선족 동포일 수도 있고, 전문적으로 중국음식만 연구한 한국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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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명동 입구에서 70여 년 간의 세월을 지켜온 취천루(聚泉樓)를 최근에 들러봤다. 개업 당시는 호떡과 교자로 시작했고 지금은 메뉴판에 달랑 네 가지 종류의 교자만 적혀있다. 취천루의 3대째 주인인 왕젠린(24)은 “교자 외에 부가가치가 높은 ‘요리’를 팔면 매출이 증가될 텐데…” 하는 사람들의 조언에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교자를 고집하셨어요. 저도 지켜서 제 자식한테 물려줘야죠”라고 답한다. 한국에서 오래된 중국 음식점을 운영하는 화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경영방침이다.
신계숙 배화여대 중국어과 교수·중국음식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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