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오페라의 유령' 무대뒤의 사람들

  • 입력 2002년 4월 4일 14시 36분


“경매 번호 666번. 부서진 샹들리에입니다. 여러분은 대부분 오페라의 유령에 얽힌 기괴한 소문을 기억하시겠죠….” 개막 10분 전. 1막1장 경매중개인역의 김장섭씨가 무대 뒤 소품 운반용 엘리베이터 속에서 큰 소리로 대사를 외우고 있다. 같은 시간 현장 총책임자인 무대감독 유석용씨(35)가 객석에서 보아 무대 왼쪽 벽 뒤 감독석에 ‘정위치’한다. 유 감독은 이제 관객의 눈에 보이지 않는 ‘뮤지컬의 유령’이 되어 커튼 조명 등 모든 것을 지시해야 한다. 3월29일 오후 7시50분‘오페라의 유령’이 장기공연되고 있는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무대 뒤 모습이다. 지난 겨울 공연이 시작돼 최근 입장관객 17만명을 넘긴 ‘오페라의 유령’ 제작진이 베일에 싸인 무대 뒤편을 동아일보 ‘위크엔드’에 처음 공개했다. 실재하는 파리 오페라극장을 배경으로 삼은 ‘오페라의 유령’은 초대형 무대장치로도 유명하다. 지금껏 제작진은 공연이 일사불란하게 준비되는 무대 뒤를 일절 공개하지 않아왔다.

평일 공연은 오후 8시. 그러나 일일무대세팅은 오후 5시 시작된다. 공연 10분 전이면 유석용 감독이 쓴 헤드셋으로는 각 부문 책임자들로부터 최종 점검이 끝났다는 보고가 날아든다.

이 시간 객석에서 보아 무대오른편 벽뒤에서 공연 시작을 기다리는 배우들 사이에는 긴장과 활기가 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는 50m가량의 긴 복도가 나 있다. 수백벌의 화려한 의상이 걸려 있으며 좌우로는 9개의 일반 분장실을 비롯해 소품실, 가발실, 2시간반의 공연 틈틈이 목을 축이는 휴게실 등이 있다. 특수분장실은 절대보안구역. 함부로 출입하면 ‘유령의 저주를 받는다’는 징크스가 있다.

“공연, 5분 전입니다.” 유 감독의 목소리가 복도 천장의 스피커에서 나온다. 극장주 피르맹 역을 맡은 중진 배우 김봉환씨가 복도 한편에서 후배들을 모아 파이팅을 외친다. “열정! 열정! 팬텀! 파이팅!”.

'오페라의 유령' 개막을 앞두고 커튼이 일순간에 부드럽게 펴지도록 스태프가 앞뒤로 차례차례 접고 있다

첫 장면 배우들이 무대로 빠르게 움직인다. 김장섭씨도 마찬가지다. 이윽고 감독의 큐 사인. “고(Go)!” 김씨가 첫 음성을 터뜨린다. “낙찰되었습니다!”

그가 첫 대사에서 토씨 하나라도 틀리면 극 전체가 흔들린다. 그래서 그는 매일 공연 시작 전 엘리베이터 속에서 대사를 외우고 또 외운다.

무대 위를 지켜보는 유 감독의 바로 앞에는 커튼, 조명 등의 작동을 지시하는 수십개의 버튼이 달린 감독 데스크가 있다. 데스크 위에는 무대와 객석 곳곳을 비추는 모니터들과 통신용 인터컴들도 놓여 있다. 감독의 자리는 무대 세트 중 극중 주인공 팬텀(유령)이 자신의 지정석이라고 공언한 ‘박스석 5번 좌석’의 바로 옆.

어둠 속의 적외선 카메라와 연결된 모니터도 있다. 객석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무대까지 떨어져 내리도록 유도하는 강철 케이블들을 감시한다. 극중에선 광폭하게 추락하게 돼있지만 실제론 극히 안전하게 ‘추락’해야 한다. 유 감독은 몇차례 점검을 끝낸 샹들리에 담당 스태프로부터 안전 사인을 통보 받은 후 헤드셋 마이크에 낮게 속삭인다. “샹들리에 스탠바이….” 무대에선 사랑을 속삭이는 라울과 크리스틴을 질투하다 분노가 폭발한 팬텀이 샹들리에를 향해 외친다. “고(Go)!” 이와 동시에 유 감독도 마이크에 속삭인다. “고(Go)!”

무대 감독석 앞에 선 유석용 감독

유 감독은 이렇듯 막이 내릴 때까지 각각 400여번의 스탠바이 사인, 큐 사인(Go)을 날려야 한다. 무전기로 그와 직통하는 20여명을 포함해 모두 80여명의 스태프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들 중 한 명이라도 4, 5초 늦거나 빠르면 곧바로 무대 사고가 발생한다. 워낙 격정적인 뮤지컬이라 부상자가 나오기도 한다.

유감독의 모니터로는 크리스틴 역의 이혜경씨가 학, 학 가쁜 숨을 내쉬며 무대옆 이른바 ‘무대포켓’ 쪽으로 달려나왔다가 밀실로 달려들어가는 모습이 비친다. 밀실에서는 3명의 도우미가 달려들어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힌다. 얼굴의 땀을 닦아내고 화장만을 손보는 스태프도 있다. 이씨는 극이 끝날 때까지 모두 11차례 옷을 갈아입는다. 땀 등으로 옷이 손상되지 않도록 방역이 철저하게 이뤄지는 무균(無菌)특수의상실에 보관하는 의상도 있다.

다시 무대로 나간 크리스틴이 라울과 함께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두 사람을 제외한 배우와 스태프들이 모처럼 숨돌릴 틈을 찾는 시간이다. 복도에서는 남자 배우 한 사람이 극중에서 팬텀의 비밀을 일부 알고 있는 것으로 설정된 마담 지리 역의 배우 나성신씨에게 농을 건넨다.

분장중인 마담 지리 역의 나성신씨

“팬텀하고 마담 지리가 옛날에 내연 관계였다던데?”

“나 참, 마담 지리가 예쁘다 보니, 별의별 루머가 다 나오네. 미모도 죄인가요?”

이들의 짧은 휴식은 2막 오페라하우스 중앙계단에서 가면무도회가 시작될 때까지다. 계단에는 실물 크기의 마네킹이 배우들 사이에 섞여 있지만 관객들은 좀체 눈치채지 못한다. 이 장면에선 팬텀역의 윤영석씨가 크리스틴을 주연으로 내세우라며 자신이 쓴 대본을 집어 던진다. 이날 공연까지 모두 134차례 던졌지만 멀리 떨어진 배우의 손에 실수 없이 날아간다. 반복 연습의 결과다. 유 감독은 “유령도 돕고 있다”고 말한다. 이 장면이 끝나고 막이 내려오자마자 무대전환 스태프 20여명이 총동원돼 순식간에 계단을 분해, 이동시킨다. 스태프의 상하의는 모두 검은 색. 걸을 때 소리가 안 나는 신발 착용만 허용된다. 이들이 어둠 속에서 신속하게 움직일 때는 상의에 야광 염색된 유령마스크만 돋보인다. 그렇다, ‘유령들’이 뮤지컬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극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크리스틴을 납치한 팬텀을 쫓아 라울 류정한씨가 다리에서 단번에 뛰어내린다. 안전 강철선은 매지 않는다. ‘비밀스러운 안전장치’가 있지만 매번 아찔하다. 위험한 순간은 또 있다. 극의 막바지 초대형 철창에서 내려 오는 장면. 1월에는 이 장면에서 굴러 떨어져 고개를 돌릴 수 없을 만큼 목을 다쳤다. 발레리나 한 사람이 사다리를 타다가 부상한 적도 있다. 그러나 오늘은 매끄럽게 완성돼 가고 있다. ‘유령의 가호’ 덕분이다.

감독석의 반대편인 무대 포켓은 주로 조감독 서형일씨가 관장한다. 이제 크리스틴과 팬텀이 보트를 타고 지하 호수를 지나는 장면이다. 서씨가 보트의 무선조종을 담당하는 스태프의 등을 침묵 속에 두드린다. ‘무선 조종 고(Go)’라는 뜻. 이때 무대 세트가 뒤로 움직이며 보트의 전진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스태프가 개막 직전 1막1장에 등장하는 샹들리에에 천을 씌우고 있다

극은 긴박하게 전개돼 크리스틴은 라울의 손을 잡고 떠나려 한다. 크리스틴으로부터 이별 반지를 받은 팬텀이 흐느끼며 “크리스틴, 사랑하오”하고 절규한다. 비가(悲歌)의 여운이 무대에 가득 퍼지더니 몰입에서 풀려난 객석에서 갈채가 터져나온다.

그러나 유 감독은 긴장을 풀지 않는다. “스탠바이 커튼 35…. 고(Go)!”

커튼 콜에 응답하려는 화사한 표정의 배우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커튼을 올리는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고 오케스트라의 ‘플레이 아웃’만이 객석 사이를 흘러다닐 때가 돼서야 그는 팬텀이 가면을 벗듯 헤드셋을 내려놓는다. “오늘도 모두 수고하셨어요.” 헤드셋에 달린 마이크를 통해 배우와 스태프 모두에게 마지막 인사를 던지고서. 커튼 뒤 배우들의 모습은 지쳤어도 함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표정들이다. 그러나 유감독의 얼굴에는 특유의 은근한 미소만 흐를 뿐 조용히 긴장이 가라앉은 얼굴이다. 끝까지 방심하지 않는 것. 그것이 이 ‘뮤지컬의 유령’이 무대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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