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고르고 나서]"그는 '절망의 시대'를 헤쳐나갔죠"

  • 입력 2002년 4월 12일 18시 42분


독일 현대문학 작품을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을 쓰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참고문헌을 수집하다 보니 유독 한 사람의 글이 지나치게 많이 모이더군요. 여러 사람의 글을 취합해야 편향된 시각의 위험을 벗어날 수 있기에, 이건 야단이다 싶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의 쟁쟁한 이름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독일 문학평론계의 제왕’으로 불리는 인물이었습니다.

제가 논문을 끝낼 즈음 그는 독일에서도 대중스타가 되어 있었습니다. 독일은 최고인기 TV프로그램의 시청률이 고작 5% 내외인데, 그가 진행한 책 비평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4% 안팎이었죠. 평생을 책에 바친 그의 예리한 안목과 유머, 지성의 향기가 흘러넘치는 풍요한 화술이 시청자를 사로잡은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주에는 그의 자서전 ‘사로잡힌 영혼’을 가장 큰 읽을거리로 소개합니다. 단지 학창시절의 추억 때문만이 아님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 책 속에는 1차대전 직후에서 오늘날에 이르는 현대 유럽의 일대기가 하나의 거대한 벽화처럼 그려져, 사뭇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흥미와 박진감마저 선사합니다.

이 책에서 만족을 얻으신 독자에게는 라이히-라니츠키보다 한 세대 앞선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지식공작소)를 추천합니다. 거리에 전등이 들어오고, 어린이들이 처음 예방주사를 맞던 현대문명의 여명기부터 2차대전으로 인간성에 대한 신뢰가 종말을 맞기까지를 역시 거시적인 관점과 유려한 필체로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마침 두 책의 번역판 모습도 형제처럼 닮아있군요. 서가에 나란히 꽂아놓아도 어울릴 듯 합니다. 비록 ‘평론가’ 라이히-라니츠키가 ‘작가’ 츠바이크에 대해 별로 호의적이지 않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하더라도요.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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