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의 60여년에 걸친 가요 인생은 서민들에게 낭만과 추억을 심어준 ‘영원한 로맨티스트의 삶’이었다. 1938년 경성 제2고보(현 경복고)를 졸업하고 일본 우에노(上野)대에 유학해 성악과 플루트를 배웠지만 교수의 꿈을 접고 일본 중국의 밤무대에서 가수로 활동했다.
해방 직후 귀국한 그는 미8군과 악극단을 전전하던 중 1947년 서울 명동 시공관(구 국립극장 자리)에서 열린 영화 ‘자유부인’ 개봉 축하 공연을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아직 음반 취입도 하지 않은 ‘신라의 달밤’(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을 불러 젖히자 객석에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앙코르 요청이 쏟아진 것이다. 그는 성악을 가요에 접목한 독특한 창법으로 데뷔 무대에서 ‘아홉 번 앙코르’ 기록을 세웠다.
당시 그의 인기는 요즘 인기 댄스 그룹 god가 무색할 정도였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검문에 걸려도 “‘신라의 달밤’ 부른 사람이요”라고 말하면 무사통과시켜 주곤 했을 정도였다.
그는 특히 영어 일어 중국어 프랑스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인텔리 가수였다. 60년대 초반 서울 명동 시공관(옛 국립극장 자리)에서 프랑스 가수 이비에트 지로와 샹송 ‘낙엽’ ‘로망스’ 등을 함께 부르기도 했다.
|
특히 6·25전쟁 직후 라이벌 관계였던 남인수와 전국을 돌며 노래대결을 펼친 ‘가요 대합전 15회전’은 ‘남진-나훈아’ 라이벌 대항과 함께 우리 대중음악계의 ‘전설’이 됐다.
그는 또 영어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인텔리’ 가수로 ‘신라의 달밤’ 외에 ‘비 내리는 고모령’ ‘고향만리’ ‘럭키서울’ ‘굳세어라 금순아’ ‘세월이 가면’ ‘서울 야곡’ ‘베사메무쵸’ ‘꿈속의 사랑’ ‘불국사의 밤’ ‘전우야 잘 자거라’ 등 1000여곡의 노래를 남긴 ‘국민 가수’였다.
74년부터 8년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샌프란시스코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했던 그는 잠시 마이크를 놓는다. 하지만 가수는 그에게 천직이었다. 81년 한국에 돌아와 야간업소와 칠순 팔순 잔치 등에 출연하며 왕년의 인기를 반추했다. 91년 대구에 그의 히트곡 중 하나인 ‘비 내리는 고모령’ 노래비가 세워졌고 가요생활 50주년 기념 앨범 ‘길’을 발표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99년부터 2년간 배삼룡 구봉서 등과 함께 악극 ‘그때 그 쇼를 아십니까’를 비롯해 KBS ‘가요무대’ 등에 출연하며 왕성한 활동을 벌였던 그는 지난해 봄 당뇨병이 악화돼 가수 활동을 중단하고 병원과 집을 오가며 투병생활을 해왔다.
99년 화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이듬해 8월 경주 불국사 앞에 그의 대표곡인 ‘신라의 달밤’ 노래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14일 오후 ‘굳세어라 금순아’가 흐르고 있는 그의 빈소에는 신카나리아 자니리 김상희 설운도 등 선후배 원로 가수와 코미디언 구봉서, 정원식 전 국무총리, 한국 연예협회 김광진 가요분과위원장 등 각계 인사들이 방문해 그의 노래와 인생에 대한 얘기로 꽃을 피웠다.
원로 악극 연출자인 박호씨(82)는 “정이 많고 생활인으로서도 모범생이었다”며 “1965년에 내가 만든 악극 ‘춘향전’에 이도령을 현인 선생이, 춘향을 백설희 선생이 맡아 노래와 연기를 했던 기억이 새롭다”고 회상했다.
유족은 미스코리아 출신인 부인 김미정씨(72)와 1남 3녀. 16일 오전 9시 한국연예예술인장으로 장례를 치르며 경기 성남시 삼성공원묘지에서 영면하게 된다. 02-3010-2270
황태훈기자 beetlez@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