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자 이진영선생 일생 韓-日 창극 무대에

  • 입력 2002년 4월 17일 18시 26분


'현해탄에 핀꽃' 제작발표회에서 인간문화재 성창순씨가 판소리를 하고 있다
'현해탄에 핀꽃' 제작발표회에서
인간문화재 성창순씨가 판소리를 하고 있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법도를 지키며 염치와 겸손으로 제 일에 충실하고 정직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일본 와카야마(和歌山)시에 있는 사찰 가이젠지(海善寺) 경내에 들어서면 본당 정면에 ‘부모 모시는 글(부모장·父母狀)’이라는 기념비가 눈길을 끈다. 노산 이은상 선생이 한글로 옮긴 이 문장을 쓴 사람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온 조선 유학자 이진영(李眞榮)선생의 아들 이매계(李梅溪).

1992년 임진왜란 400주년을 맞아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 이진영, 매계 부자의 일생이 6월 한국과 일본에서 ‘현해탄에 핀 매화’라는 제목의 창극으로 무대에 올려진다.

이들 부자는 부모를 살해하는 일이 빈번할 정도로 미개했던 옛 일본인들에게 효와 인륜을 가르친 일본 기슈(紀州·와카야마 일대의 옛이름)유학의 창시자.

경남 영산 출신인 이진영 선생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가 23세의 젊은 나이에 포로로 끌려와 와카야마에 있는 가이젠지에 머물며 이 일대에 주자학을 전파했다. 그는 기슈번(藩)의 번주이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10남인 도쿠가와 요리노부(德川賴宣)에게까지 그 명성이 알려져 번주에게 학문을 강의하는 시강(侍講)으로 초빙돼 63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르침에 힘썼다. 이진영 선생이 번주 요리노부에게 중점적으로 심어준 것은 주권재민(主權在民)과 덕치(德治)사상. 요리노부에게 보낸 1336자로 된 편지에서 그는 ‘정치는 국민을 기본으로 하고 근본을 지키면 나라는 태평해진다. 덕으로써 국민을 다스리면 그 덕은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진다’고 썼다.

그가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낳은 아들 이매계 역시 부친으로부터 학문을 이어받아 와카야마의 도덕규범을 담은 수많은 저서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이매계가 지은 ‘부모장’은 그후 250년간 이 지역 교육지침서로 채택돼 1890년 일본의 근대 교육칙어가 선포될 때까지 아침 저녁으로 낭송돼 왔다.

이들 부자의 이야기는 와카야마현내 초등학교 5,6학년 읽기 부교재에 소개돼 있다. 가이젠지 경내에 있는 이들의 묘도 와카야마시의 지정문화재.

가이젠지의 다무라 간코(田村歡弘·66)주지는 “이진영 선생 부자의 가르침은 아직도 와카야마 현민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며 “월드컵을 앞두고 이들의 이야기를 양국에서 전통 창극으로 공연하는 것은 과거 문화교류사의 큰 의미를 되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와카야마〓이영이특파원yes202@donga.com

◆ 시대 넘어선 선비의 기개와 사랑

‘현해탄에 핀 매화’는 판소리를 기본으로 한 한일합작 신창극. 이상희 원작 ‘파신(波臣)의 눈물’을 토대로 재구성했으며 성창순(成昌順)씨와 일본인 여배우가 출연한다.

대한전통예술보존회와 주일 한국문화원 등이 주최하고 동아일보, 도쿄(東京)도 등이 공동 개최하며 6월1일 한국의 광주 공연을 시작으로 대구(6월 10∼11일) 서울(15∼16일)과 일본 도쿄(21∼23일)와카야마시(26∼27일)에서 차례대로 공연될 예정이다.

극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온 의병 부장이자 유학자인 이진영 선생의 국경을 초월한 사랑이 중심 주제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포로가 된 이진영 선생은 오사카 등 각지를 전전하다 와카야마에 정착해 서당을 열고 유학 전파에 전념한다. 기슈번주인 도쿠가와 요리노부로부터 신하가 되달라는 부탁을 받지만 그는 ‘두사람의 군주를 섬길수는 없다’며 거절한다. 요리노부를 그를 시강으로 초빙한다.

그는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두 아들을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만 조선에 있는 부모를 잊지 못한다. 불효자의 신세를 한탄하는 이진영 선생을 보고 부인은 그를 조선으로 탈출시키기 위해 몰래 배를 준비한다. 배를 타고 조선으로 향하던 그는 사랑하는 처를 뒤돌아보고 바닷물에 뛰어들어 기슈해안으로 헤엄쳐 돌아온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은 아들 이매계는 와카야마의 정신적 지주로 전해지는 ‘부모장’을 지어 일본인들을 교화시킨다.

도쿄〓이영이특파원yes20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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