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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맨해튼의 타임스스퀘어에 있는 뉴욕타임스 편집국 3층에서는 수상 발표 당일 자축파티가 열렸다. 레인즈 국장과 발행인 아서 설즈버거 주니어, 수석부국장 제럴드 보이드가 차례로 마이크를 잡았다. 카메라는 설즈버거 발행인과 레인즈 국장이 전우처럼 뜨겁게 포옹하는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2001년 5월 발행인이 사내 집배신망에 ‘하웰 레인즈가 9월에 신임 편집국장이 될 것’이라는 메일을 띄웠을 때 편집국은 술렁거렸다. 레인즈 국장은 평기자 시절 뉴욕타임스 본사 편집국에서 근무한 적이 없다. 1943년 남부 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태어나 버밍햄서던칼리지를 졸업한 뒤 64년 지역신문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뉴욕타임스 애틀랜타 지국으로 스카우트된 것은 플로리다의 세인트피터즈버그신문에 몸담았던 78년. 이후 워싱턴지국장을 거쳤지만 본사 입성은 93년 논설주간으로서였다. 뉴욕타임스 10층의 논설실은 3,4층의 편집국과는 마치 성속(聖俗)의 두 세계처럼 떨어져 존재했다.
발행인에게는 또 다른 차기 편집국장 카드로 빌 켈러가 있었다. 켈러씨는 구 소련 붕괴 취재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국제통이었으며 수석부국장으로서 수년간 편집국을 훌륭히 조율해 왔다. 그러나 발행인은 ‘와일드카드’를 골랐다. 92년, 나이 마흔에 뉴욕타임스 경영권을 승계한 설즈버거 발행인은 전통의 뉴욕타임스가 더 발랄해지고 더 젊은 독자들에게 다가가야 미래가 있다고 판단했다. 더 많이 논쟁의 중심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레인즈 논설주간은 발행인의 의중을 꿰뚫었다. 그는 논설실을 ‘미국의 힘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두려움을 갖고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거대한 활화산’으로 만들었다. 그가 논설주간이 되던 날 대통령에 취임한 빌 클린턴이 숙명의 표적이 되었다. 그는 클린턴 행정부를 ‘거대한 종양’ 클린턴을 ‘거짓말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치 않았다. 그는 독선적이되 매력적인 문장가였다. 레인즈실장이 발탁한 게일 콜린스, 모린 다우드, 토머스 프리드먼 등 젊은 논객들도 오만하리만큼 직설적이며, 유행에 민감하고 해박한 기명 사설로 지적인 젊은 독자들을 사설 페이지로 다시 불러들였다.
설즈버거 발행인은 그런 레인즈에게 승부를 걸었다. 2002년의 퓰리처는 설즈버거 발행인에게 그의 풀베팅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요란하게 확인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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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11일 오전 10시경 황급히 택시에서 내려 편집국으로 들어선 레인즈 국장은 차분한 분위기에 오히려 당혹스러웠다. 아무도 뛰어다니지 않았고 소리치지 않았다. 편집국은 엄청난 폭발에도 손상되지 않은 시계처럼 부장들의 지시에 따라 조용히 그러나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레인즈씨가 편집국장이 된 지 엿새째 되는 아침이었다.
“때로 편집국장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지시는 ‘그냥 하던 대로 계속해!’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그날의 내가 그랬다. 마감시간이 되자 각 부장을 거친 흠 하나 없는 원고들이 들어왔다. 내가 컴퓨터 주변을 어슬렁거릴 필요가 없었다.”(레인즈 국장, ‘에디터 앤드 퍼블리셔’와의 인터뷰 중)
대신 그가 하루종일 왔다갔다했던 곳은 사진부였다. 그의 관심은 이 사태를 어떻게 시각적으로 표현할 것이냐에 쏠려 있었다.
니컬러스 크리스토프 부국장은 레인즈국장의 강점을 “시각적 효과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난 것. 그래서 꼭 필요한 곳에 사진기자를 보내 생생한 현장사진을 찍게 하는 것”이라고 꼽는다. 뉴욕타임스가 올해 퓰리처상에서 9·11 테러 참사 현장과 아프가니스탄 내전 현장 사진으로 속보와 기획사진 부문을 석권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레인즈 국장은 ‘11일’ 이후 5, 6주간 부국장부터 평기자까지 직접 만나 한 가지 질문을 집요하게 던졌다. ‘지금 우리가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퓰리처상의 공공봉사부문을 수상한 테러 특집섹션 ‘도전받는 나라(A Nation Challenged)’도 치열한 문답에서 나왔다. 이 섹션은 9월18일부터 12월31일까지 발행됐다. 백미는 희생자들의 부음기사인 ‘슬픔의 초상들’면이었다. 아이디어는 메트로뉴스팀의 한 평기자와 차장으로부터 나왔지만 레인즈 국장은 여기에 거대한 엔진을 달았다.
‘마이클 C 피오레, 세 아이의 아버지. 소방서 올스타팀의 농구선수이며 아이들을 코치했다.’
‘타티아나 바칼린스카야, 94년 우크라이나에서 이민. WTC 93층의 웨이트리스였던 그녀는 뉴욕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자신의 일터를 사랑했다.’
가족 친지들이 짧은 문장 속에 담은 평범한 희생자들의 사진과 부음은 어떤 조사나 격문보다도 더 생명이 얼마나 존엄한 것이며 왜 그를 지키기 위해 폭력에 맞서야 하는가를 힘있게 호소했다. 영국 신문 ‘가디언’의 해럴드 에번스 기자는 “온 뉴욕이 매일 아침 ‘도전받는 나라’ 섹션을 읽으며 거대한 영성체 의식을 치른다”고 썼다.
‘도전받는 나라’의 제작을 위해 뉴욕타임스가 치른 대가는 적지 않다. 12페이지 별도 섹션에 광고는 거의 없었다. 2001년 11월 현재 광고수입이 전년 대비 21%나 줄어드는 어려움 속에서 발행인도, 재닛 로빈슨 사장도 레인즈 국장에게 수지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뉴욕타임스로 영성체를 체험하는 독자들의 가치는 단기에 계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 뉴욕타임스 기자이며 뉴욕타임스를 해부한 ‘더 트러스트(The Trust)’의 공동저자인 앨릭스 존스는 레인즈 국장이 “지나치게 열심히 듣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문제는 그가 무엇엔가 흥미를 갖고 물을수록 사냥감을 쫓는 매처럼 공격적이 된다는 것이다. 답하는 사람이 겁에 질릴만큼….”
레인즈 국장은 퓰리처상 수상 자축연에서 모교 앨라배마주립대의 전설적인 미식축구 코치 베어 브라이언트의 말을 인용했다. 그는 “누군가 승리를 축하할 때마다 브라이언트는 ‘내가 혼자 경기를 한 게 아니라 팀이 승리한 거요’라고 답했습니다. 오늘 그의 말은 더욱 적합하게 들어맞습니다”라고 편집국의 팀워크에 찬사를 보냈다.
그의 팀플레이는 결코 온정적이지 않다. 그를 겪어본 사람은 그가 ‘스타’로 인정하지 않는 기자들에게 얼마나 무심하고 냉정한지를 몸서리치게 기억한다. 그의 주문은 “최고 아니면 최초가 되라”는 것이었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지지자인 칼럼니스트 모린 다우드는 레인즈 국장의 됨됨이에 관해 “피츠제럴드보다는 헤밍웨이, 탐 크루즈 보다는 니콜 키드만, 비극보다는 코미디를 좋아하며 ‘그리고(and)’로 시작되는 문장을 혐오하고 ‘근육질적(muscular)’이라는 표현을 사랑한다. 낚시에 관해 몇 시간을 떠들 수 있으며 록가수인 아들의 공연장은 어디든 쫓아간다. 절대적으로 방어보다는 공격을 택한다”고 뉴욕타임스 사외보에 썼다.
그는 이미 최상위인 뉴욕타임스 편집국의 질서를 재편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아트 & 레저’ 섹션 에디터를 교체했다. 요즘에는 내셔널 데스크(정치부+사회부)가 타깃이다. 표면적으로는 정기 인사이동이지만 레인즈 국장은 전면적인 인력교체를 진행하고 있다. 편집국은 동요하지만 그가 노리는 것은 긴장과 활기다.
“내부에서 경쟁적인 신진대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9·11 테러 사태는 뜻하지 않게 내부 신진대사 수준을 최상위로 높여 준 기회였다.”(레인즈 국장, ‘에디터 앤드 퍼블리셔’와의 인터뷰 중)
뉴욕의 언론인들은 뉴욕타임스 뉴스룸이 레인즈 국장의 지휘 아래 스스로 ‘도전받는 편집국’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찬사와 두려움이 엇갈리는 가운데 그의 에디터십이 지향하는 점은 간단하고 분명하다.
“저널리즘에는 단 하나의 목표가 있다. 매일 최고의 저널리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정은령 기자 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