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리즘(잠언)도 짧아야 아포리즘이다. 속담은 가장 짧은 아포리즘이다. 세르반테스의 관찰처럼, 인생의 긴 경험을 한 줄에 담아내는 것이 속담이라면 삶의 깊은 진실과 통찰을 서너 줄로 요약하는 것이 아포리즘이다. 단편은 장편소설을 줄인 것이 아니라 그 특유의 장르 규약에 따라, 그리고 그 장르의 힘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짧은 형식을 취한다. 신문 칼럼이나 논평, 수필 등의 글도 성질상 길 수가 없다.
충분한 책읽기의 시간을 주지 못하는 것은 현대적 삶의 악조건 가운데 하나이다. 정신 없이 뛰어야 하고 숨가쁘게 달려야 겨우 먹고 살 수 있는 조건 속으로 내몰리다 보면 긴 글을 잡고 앉아 있을 겨를이 없다. 누구나 참새처럼 민첩해야 하고 제비처럼 빨라야 한다. 속도를 늦추다가는 언제 도태될지 모른다.
그러나 현대적 삶이라 해서 반드시 참새의 민첩성이나 제비의 속도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높이 치솟는 독수리의 비상도 필요하고 학처럼 길게 나는 장거리 비행도 필요하다. 구태여 비유하자면, 짧은 글이 제비의 날개 같은 민첩성의 미덕을 갖고 있다면 긴 글은 독수리의 비상 혹은 학의 비행처럼 긴 호흡과 참을성만이 줄 수 있는 값진 선물들을 갖고 있다.
문제는 짜투리 시간을 이용한 이른바 ‘3분 독서’나 길어야 10분을 넘기지 못하는 토막글 읽기의 습관에 빠지면 호흡이 짧아지고 금세 숨이 가빠져 긴 글을 읽어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인생살이가 단거리 뜀박질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장거리 경주이고 긴 여행이란다면, 거기에는 긴 호흡과 인내도 필요하고 명상과 관조의 시간도 필요하다. 정밀한 논의와 분석, 깊은 관찰과 묘사, 자세한 경험의 기술 등은 성질상 짧을 수가 없다. 짧은 글의 재미가 있듯이 긴 글의 재미도 있다. 토막글 읽는 습관만으로는 긴 글의 재미를 경험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삶의 풍요화가 아니라 박탈과 빈곤화의 한 모습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독서계는 짧은 글과 쉬운 글을 선호하는 쪽으로 책읽기의 습관을 굳히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물론 짧은 글이라 해서 모두 쉬운 것은 아니고 긴 글이 모두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짧고 쉽게’라는 것이 저술, 출판, 독서의 지상 명령이 되고 가장 현명한 전략이 된다면 그것은 개인이나 사회를 위해 보통 위험한 일이 아니다. 육체 근육을 단련할 필요가 있듯이 정신의 근육도 조련을 필요로 한다. ‘쉽고 짧게’의 전략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것이 정신 훈련이다. 이 훈련을 위해서는 길고 어려운 책도 읽는다는 ‘우리들 개인의 문화정책’이 필요하다.
‘한 권의 책’조차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본 경험 없이 대학문을 나서는 젊은이들도 없지 않다. 쉬운 책은 대학생의 독서 대상이 아니다. 책이 우리에게 날개를 준다면 기본적으로 그 날개는 높게 나는 독수리의 날개이고 길게 나는 학의 날개이다.
도정일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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