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무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그동안 KNCC가 쌓아온 업적이 너무 커 부담스러운 마음에 기도와 연구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KNCC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 뚜렷한 성과를 남겼지만 교계 일각에서는 제도적 민주화가 어느 정도 달성된 만큼 위상도 달라져야 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독재 정권에 대한 굽힘없는 항거는 KNCC의 자랑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대한 오해를 받게 됩니다. 정치 단체같은 인상을 주게된 거죠. KNCC가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KNCC가 하나님의 교회로, 정의와 평화를 일궈나가는 도구로 사회와 동떨어져 불의에 침묵할 수 없다는 신앙 고백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민주화가 됐다고 해도 우리 사회에 불의의 요소가 존재하는 한 이를 변화시키는 게 KNCC의 일입니다.”
-KNCC는 북한 교회와 북한 주민을 돕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대북 지원과 마찬가지로 일방적인 ‘퍼주기’가 아니냐는 비판도 있습니다.
“북한에 식량을 제공하는 것, 평화 통일운동은 하나님의 ‘샬롬(평화)’을 이루기 위한 노력 입니다. 이 운동이 중단됐을 때 북한 사람만 상처받는 게 아닙니다. 북한이 식량난 등으로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평화통일도 없고 현실적으로도 엄청난 통일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겁니다.”
-최근 교회의 일치 운동에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지난해 개신교 22개 교단장이 참여한 한국교단장협의회가 창립됐고 지난 3월에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김기수 대표회장이 KNCC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기구나 단체의 일치 자체가 목적이 되면 새로운 분열이 ‘시한폭탄’처럼 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교회가 지향할 바람직한 일치 운동은 많은 시간이 소요되더라도 모든 교회구성원이 참여하여 최소한의 합의를 이뤄내는 작업이 선행돼야 합니다.”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됐던 교회 세습과 기독교 방송 사장 선임을 둘러싼 갈등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원칙적인 의견입니다. 한국 교회는 여러 이유로 도덕적 문제에 직면해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목회자이건 평신도이건 누구든지 교회를 사유화할 수는 없습니다.”
백 총무는 KNCC 총무로는 드물게 사회 활동보다는 목회 활동 경험이 많다. 97년 KNCC 부총무가 되기 전 81년부터 서울 을지로교회와 청량리중앙교회, 산성교회 담임 목사를 지냈다.
-일각에서는 신임 총무가 KNCC 이전 목회 활동의 경험이 많고 영성 운동에도 관심이 많아 진보적 색채가 짙은 KNCC에 변화가 올지 모른다는 예측도 있습니다.
“…. 그렇습니까(웃음).”
-애매한 말이지만 총무님을 ‘중도 우파’라고 하면 맞습니까.
“‘중도 우파’요? 그렇게 봐야죠. 몇 년전 교계의 한 어른이 제가 KNCC 부총무가 됐다니까 ‘그렇게 얌전한 사람이 이렇게 과격한 줄 몰랐다’고 하더군요. 전, 교회 일치 운동에 관심이 많은 데 그걸 제 기준에서 보면 사회 참여를 잘하는 것입니다.”
-목회 활동과 부총무 시절 기억에 남는 일은 어떤 것입니까.
“1995년 성수대교 붕괴 때 일입니다. 당시 현대백화점 직원들이 ‘사고당한 이들이 바로 성수대교를 오고 가는 우리 백화점 고객’이라며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누군가 이런 내용을 전하면서 ‘교회는 뭐하고 있습니까’라고 묻더군요. 부끄러웠습니다. 그 뒤 96년 삼풍백화점 붕괴 때 산성교회 교인들과 현장을 지켰는 데 저나 교인들에게 큰 가르침이었습니다.”
백 총무는 다소 비좁은 KNCC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직원에게 “이 내용이 맞죠”라며 즉석 자문을 구하는 등 신중하면서도 소탈한 면모를 보였다.
“서울 명동에서 양품점하는 장사꾼 집 아들이었습니다. 돈으로 만사가 해결될 수 있기에 돈의 귀함과 어려움을 몰랐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느 목사님 댁에 갔다 두루마기와 금박 성경을 봤는 데 너무 멋있어서 어린 마음에 목회자가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65년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한 그는 곧바로 장로회신학대에 입학했으나 신학교의 분위기에 실망해 한 학기를 마친후 군에 입대했다. 몸무게가 43㎏에 불과해 귀향조치될 뻔 했으나 어떻게 해서든 군에 가고 싶어 군의관을 졸라 입대했다. 제대후 ‘사회생활’에 재미를 붙여 8년동안 지냈으나 영적인 갈급함을 어찌할 수 없어 8년만에 다시 신학교에 입학,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홍익대 미대 출신의 黃鷄淑(58)사모는 변두리에서 미술교습과 보따리 장수를 마다하지 않으며 남편을 후원했다.
백 총무 표현에 따르면 세상의 어려움을 모르던 ‘철없는’ 목사는 특히 산성교회 담임 목사 시절과 KNCC 부총무 경험을 통해 ‘하나님 일은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다’는 가르침을 얻었다고 했다.
-자주 인용하시는 성경 구절이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빌립보서 4장13절,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입니다. 65년 공부하던 시절 고 한경직 목사께서 손에 ‘빌. 4. 13’이라고 써주시더군요. 힘들 때마다 나를 지탱해 주는 ‘말씀’ 입니다.”
김갑식 기자 gs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