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톡인터뷰]정경화 "큰아들 피아노 반주 호흡 가장 잘맞아요"

  • 입력 2002년 4월 23일 18시 12분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을 예상했던 기자의 빈곤한 상상력은 처음부터 벽에 부딪쳤다. 양손으로 커다랗게 제스처를 써보이면서 정력적으로 말하는 그의 모습은 1970년대 외지에 소개된 ‘아시아의 암호랑이’에서 변한 것 없는 그대로였다. 20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회를 가진 현역 바이올린계의 ‘여제’(女帝) 정경화를 연주 전날인 19일 숙소인 서울 매리어트호텔에서 만나 평소 듣기 힘든 ‘가정과 휴식’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기자가 처음 내민 것은 그가 데뷔 직후인 70년대 초반 데카사에서 내놓은 브루흐 협주곡 1번 LP음반이었다. 20여년 동안이나 애청하고 있는 이 음반을 내밀자 소매없는 시원한 블라우스 차림의 정씨는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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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캠페! 컬러가 기막힌 분이죠. 숲에 바람이 솨솨 흘러가는 것 같은 브루흐의 현악부를 정말 기가막히게 해냈어요.”

그는 음반 뒷면에 영어로 ‘멋진 추억입니다. 한 음악애호가가 다른 음악애호가에게. 2002년 4월 19일 정경화’ 라고 적었다.

지휘자 얘기가 나온 김에 특별히 협연하기 좋은 지휘자가 있는지 물었다.

“불편했던 지휘자는 있어요.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내 호흡대로 강렬하게 쫓아와주지 않았거든요. 지금은 나도 나이가 들고 호흡에 여유가 커졌으니까, 요즘같으면 좋은 협연이 되겠지만, 그때는 지금같은 여유가 없었어요.”

60년대 세계 무대로 나간 그의 말투에는 북쪽 억양이 엿보였다.

-어머님(이원숙)이 함경도 원산 출신이시죠.

“맞아요. 한번 어머니 모시고 원산 바닷가 가야지 하는 게 꿈이죠.”

-어머니가 어떻게 자녀들을 키우셨길래 정경화 정명훈 정명화라는 대가를 길러내실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느 집이나 어머니란 다 충실하죠. 자식들이 성공하지 않았다고 해서 헌신하지 않은 어머니인가?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유니크한 점이 있어요. ‘어드렇냐’ 하면, 생일이다 입학이다 해서 격식대로 때맞춰 챙겨주시는 거 보다는, 필요한 부분을 딱 집중해서 ‘셋업’해주시는 그런 분이었거든요. 대담하고, 한번 결정하면 무서울 정도예요.”

어머니로서의 그는 어떨까. 아들 자랑을 해보라고 했더니 “아휴” 하는 즐거운 비명이 얼굴에 떠올랐다.

“질문 잘못한 거예요. 자랑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어요. 작은 애(유진)가 열 네 살, 큰 애(재곤)가 열일곱 살이죠. 큰 애는 피아노를 쳐요. 큰 애는 요즘에야 피아노로 자기 진로를 정하겠다고 완전히 마음을 잡았어요. 덤덤히 그래라, 하고는 속으로 ‘됐다!’ 했죠. (웃음)”

그는 재곤과 집에서 ‘협연’할 때 가장 호흡이 잘 맞는다고 말했다. “뱃 속에서부터 엄마 연주를 들어서 그런 모양”이라며 웃었다. ‘입가에 미소’라는 표현은 그에게 맞지 않다. 치열을 고스란히 보이는 환한 웃음.

한창 활발할 나이의 아이들과 엄마는 뭘 하며 휴일을 보낼까.

“나는 운동 못해요. 남편하고 아이들은 스키를 잘 타는데, 나는 스키장 따라가서 경치구경이나 하고 차나 마시고 있는 거죠.”

내친 김에 물었다. 망중한은 어떻게?

“TV에서는 클래식 무비를 즐겨 봐요. 비디오도 빌려보죠. 그래서인지 재곤이가 학교에서 필름 코스도 들었어요. 소질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구라파’에 연주 가면 항상 박물관을 들러요. 그림을 보면서 시간가는 줄 모르죠. 애들도 좋아해요. 그런데 요즘은 옛날처럼 몇시간씩 서서 보지는 못하겠어요.”

비행기로 전세계를 돌아다니는 그도 여행을 꿈꾼다. “아이들이 대학교 가면 함께 여행을 많이 하고 싶어요. 지금은 아이들이 집에 묶여 있으니까. 여행에서 겪는 문화적 체험은 정말 흥분되고 귀한 거에요.”

남편은 안 데리고 가나?

“같이 가야죠! 남편(제프리 리게티·무역업·영국인)은 역사에 관심이 많아요. 역사에 관한 책이나 다큐멘터리를 항상 봐요. 내성적인 편이고. 현악을 좋아하냐구요? 사실은, 오페라를 더 좋아해요. 피아노도 연주하죠. 연주가로서 뉴욕에 근거지를 갖고 있는 나는 애들하고 함께 살고 있고 남편 직장은 원래부터 런던에 있으니까 왔다갔다 하면서 지내요. 그것 때문에 오해도 받았죠.”

그에게도 남아있는 목표가 있을까? 아니면 가까운 장래 계획이라도?

“연습하고, 연주하고, 기쁨을 주는 일! 언제나 그렇죠. 참, 80년대에 베토벤 소나타 전집을 녹음하려 연습하다 음반사 사정으로 중단된 적이 있어요. 그 일이 다시 진행될 것 같아요. EMI에서 전집으로 나오게 될 것 같아요. 올해는 힘들 것 같지만.”

정경화가 표지에 등장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앨범! 요즘들어 그에게 부쩍 ‘약해진’ 해외 평자들이 어떤 평을 쏟아낼까 궁금해졌다.

-요즘 해외 음악전문지에 실리는 음반평의 톤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이미 모두 높이 평가하는 대가 정경화씨가…’라는 식이예요. 영국의 한 전문지는 데뷔 30년을 기념하는 코멘터리를 내기도 했구요.

“확실히 요즘 나오는 기사들에 따뜻한 느낌이 배어있어요. 그럴 때 생각해보죠. ‘내가 따뜻한 사람이라 그런가?’ 아니에요. 나는 신경질적이고 아등바등, 속에 불이 타는 사람이죠. 한번 연주할 때 속으로 다 태워내기 때문에 너무너무 힘들었어요. 젊을 때 특히 그랬어요. 이제는 속으로 생각을 하면서 적당히 태워내니까 다 타지 않아요.”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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