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의 고향을 찾아서(2)]경주 분황사-황룡사 터와 원효

  • 입력 2002년 4월 28일 17시 39분


황룡사터의 당간지주. 원효가 '금강삼매경'을 강론해 좌중을 압도했던 이 곳은 지금 텅 빈 터로 남아 있다.
황룡사터의 당간지주. 원효가 '금강삼매경'을 강론해 좌중을 압도했던 이 곳은 지금 텅 빈 터로 남아 있다.

“한 마음(一心)의 근원은 유(有)와 무(無)를 떠나 홀로 맑으며 진(眞)과 속(俗)을 융합하여 깊고 고요합니다. 깊고 고요하게 둘을 융합했으나 하나가 아니며, 홀로 맑아서 양변을 떠나 있으나 중간도 아닙니다.”

원효(元曉·617∼686)는 신라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皇龍寺)의 법좌(法座)에 앉아 세상에 전설처럼 전해져 온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강론했다. 그가 사자후를 토하자 그곳에 모여든 수많은 승려들이 감탄하며 머리를 조아렸고 예전에 고승들의 법회에 원효의 참석을 반대했던 고승대덕들마저 고개를 숙이며 부끄러워했다.

1300여 년 전 원효가 법력(法力)으로 좌중을 압도하던 그 자리는 이제 2만여 평의 황량한 절터만 남아 있다. 옛 분황사(芬皇寺)의 당간지주(幢竿支柱)였으리라 추측되는 돌 기둥 두 개만이 텅 빈 벌판에 홀로 서서 그 곳을 경계로 장대한 황룡사가 펼쳐져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사람 키의 몇 곱절은 될 법한 두 개의 돌 기둥과 그 돌 기둥들 사이에 한쪽 앞발이 잘려나간 채 엎드려 있는 거대한 거북모양의 당간 받침대. 그리고 드넓은 황룡사 터 곳곳에서 발견된 지줏돌과 크고 작은 석재와 기와조각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절 터 주변 채소밭에서 분주한 아낙들의 손놀림. 1300년의 세월은 거기 그렇게 있었다.

황룡사 터 북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옛 모습에 비해 이제는 아담한 모양으로 남아 있는 분황사가 눈에 든다. 분황사 문을 들어서자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석탑.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 있지만 전문가들은 이 탑의 형태로 보아 본래 7층이나 9층 정도는 됐으리라 추측한다.

그 곳에는 화쟁국사(和諍國師) 원효와의 인연을 알려주는 ‘화쟁국사비(碑)’의 받침대가 남아 있다. 안타깝게도 비는 사라졌지만 받침대에는 그것을 발견해 낸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남긴 글씨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분황사 석탑
분황사의 석탑. 지금은 3층만 남아 있는 이 석탑은 본래 7층 내지 9층의 거대한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말년의 원효는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짓다가 도중에 그만 붓을 놓았고, 이어 70세의 나이에 입적했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설총이 아버지의 뼈를 갈아 흙과 함께 빚어 원효의 상(像)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원효가 죽자 설총이 그의 뼈를 부숴서 그의 모습을 빚어 분황사에 모시며 한평생 존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표시했다. 어느 날 설총이 그 옆에서 예불을 드리니 원효의 상이 갑자기 돌아보았다는데 지금까지도 몸을 돌린 모습 그대로 있다.”

당대 최고의 승려였던 원효가 속세의 아들이 드리는 예불에 감동해 고개를 돌렸다는 것이고, 그 고개를 돌린 상이 일연 당시에 그 모습 그대로 있었다는 이야기다. 불행히도 이 아들에게 ‘한눈을 판’ 원효의 상은 전해지지 않는다. 대신 분황사의 뜰 한 켠에는 아직도 번뇌와 씨름하고 있는 듯한 작은 불상들이 놓여 있다.

“원효스님이요? 우리 부처님이죠.”

원효의 영정이 모셔진 보광전(普光殿)에는 예불 드리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중앙에 약사여래동상(藥師如來銅像)이 있고 그 옆에 원효의 영정이 있다. 석가의 진신(眞身)이라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도 아니요 자비의 화신인 관음보살(觀音菩薩)도 아니다.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지친 삶을 돌보는 부처인 약사여래상 옆에 있는 원효는 ‘영험(靈驗)한’ 부처님이다. 역사 속의 위대한 철학자 원효는 이 보광전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그들의 삶을 위로해 줄 ‘일상’의 부처님이다.

유려한 문체와 치밀한 구성으로 200여 권을 저술하며 역사를 꿰뚫고 불법(佛法)의 진수를 전할 만큼 불교학에 일가를 이룬 대학자였지만, 중생들 틈에서 그들과 함께 하며 거리낄 것 없는 무애행(無碍行)을 펼치며 살았던 원효였기에, 그는 죽어서도 범부들의 의지처가 된다.

그래서인지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전설 같은 일화가 맴돈다. 혜공스님과 개천에서 물고기 살려내기 시합을 하며 놀았고,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기 위해 일부러 물에 빠지기도 했고, 관음보살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해 망신을 당했다 등 ‘인간’ 냄새 풀풀 나는 이야기들이다.

환웅과 단군이 인간세상에 애정을 가졌듯이 원효도 세간을 사랑했다. 세속의 끈을 놓지 않은 이 인간적인 승려는 민중들 곁을 떠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던 길에 굴 속에서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달게 마셨다가 다음날 아침 그것이 썩은 물임을 알고는 ‘세상 모든 것이 마음에 의해 이루어졌다(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는 것을 깨달았다는 원효. 그는 그 길로 다시 돌아와 신라에 머물며 당대 최고의 승려가 됐다.

세상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그의 ‘한 마음(一心)’ 앞에서는 당나라와 신라가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앞에서는 오랜 삼국통일의 전쟁 속에서 죽은 자도 살아남은 자도 하나요, 귀족과 평민도 하나며, 깨달은 자와 중생도 하나였다. 그 앞에서는 존재의 실상을 전하는 진여문(眞如門)과 범부들을 위해 방편으로 설파하는 생멸문(生滅門)의 구별도 무너졌고, 당시 동아시아 불교계를 양분한 중관(中觀)과 유식(唯識)의 대립도 설 자리가 없었다. 모든 대립과 분별은 그의 화쟁(和諍)사상을 통해 무너져 내리며 ‘한 뜻(一味)’이 됐고 그것은 결국 ‘한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었다. 모든 분별은 그 ‘한 마음’에서 나오므로 그 모든 분별을 거둬갈 것도 그 마음이라는 것이다.

이 당대 최고의 승려요 우리 민족 역사상 최고의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그를 키워내고 그의 철학을 잉태한 것은 바로 천년의 불국토인 신라요, 경주였다. 경주 남산을 가득 메운 사찰과 불상부터 경주 시내 곳곳에 스며 있는 불교문화. 불국사와 석굴암과 마애삼존불을 찾는 사람들.

“저 비로자나불은 왜 오른쪽 검지손가락을 하늘로 올리고 있나요?”

“저 하늘나라에 부처님의 세계를 가리키는 거래.”

불국사 대웅전 앞 곳곳에서 현장학습을 하고 있는 초등학생들, 멍하니 마애삼존불을 바라보고 서있는 벽안의 아가씨들. 그 곳에서 불교는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우리의 삶과 문화다.

경주 곳곳에 스며 있는 이 불교문화는 풍부한 문화콘텐츠가 되어 ‘원효’라는 대학자를 낳을 수 있었고, 그 ‘원효’는 오늘 그의 영정 앞에서 예불을 드리는 할머니의 마음에, 다보탑을 그리고 있는 소년 앞에 ‘한 마음’으로 살아 있다.

그 ‘한 마음’으로 천년왕국 신라의 분열과 동아시아 불교계의 대립을 끌어안았던 원효의 사상은 이제 남북분단과 지역주의의 높은 벽과, 문명과 종교의 갈등을 풀어 줄 사명을 맡을 차례다. 분황사 보광전 약사여래 앞에 놓인 시계는 오늘도 원효가 지낸 천년의 세월을 무심히 지나치고 있다.

▼원효와 '용광로론'

한반도는 문화의 용광로라고 한다. 대륙의 온갖 문화가 들어와 반도에서 융합되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본래 한반도에 있던 문화와 융화되어 토착화된 문화가 된다. 도교, 불교, 유교도 한반도에 들어와서는 지역의 무속사상과 어우러져 우리의 문화가 됐다.

원효대사 영정.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막힌 넓지 않은 땅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대립과 반목과 갈등이 유난히 격렬해지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한데 만나 부딪히며 함께 새로운 문화를 잉태해 낼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원효의 화쟁(和諍)과 일심(一心) 사상은 바로 이런 문화적 특성이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사상이다.

인도에서 발원한 불교는 중국에 들어와 오랜 세월을 거치며 많은 종파로 나뉘어 반목과 갈등을 하고 있었고, 원효가 살았던 7세기에는 이를 극복하는 것이 동아시아 불교계의 가장 큰 과제였다. 원효는 백가쟁명(百家爭鳴)하는 각 종파의 주장을 검토했고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을 지어 이를 하나로 회통시키려 했다. 불교의 뿌리가 하나이고 근본정신이 같으니 결국은 그렇게 분열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대승기신론’의 ‘일심이문론(一心二門論)’을 응용한 원효의 사상은 이런 그의 정신을 총괄하는 탁월한 견해였다. 그는 당시 불교학의 구도를 크게 중관(中觀)과 유식(唯識), 또는 무(無)와 유(有)의 주장으로 정리했고 이를 ‘한 마음(一心)’으로 귀결시킨 것이다. 즉,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인연으로 인한 것일 뿐 실재는 없다고 ‘무(無)’를 주장하는 중관(中觀)과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유(有)’를 주장하는 유식(唯識)도 결국은 ‘한 마음’의 양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무(無)’를 설하는 것이 세상의 실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하여 ‘진여문(眞如門)’이라고 이름짓고, ‘유(有)’를 주장하는 것은 현상의 변화를 설명해 중생들을 진리로 이끄는 것이라 하여 ‘생멸문(生滅門)’이라 했다. 진여든 생멸이든 이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은 모두 ‘한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대립과 분별을 내는 것도 그런 분별을 거두는 것도 오직 한 마음뿐이라는 것이다.

김형찬 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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