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며느리
-결혼하자마자 미국간 아들 내외가 돌아오면 가까이 지내면서 자주 만나리라 생각했지. 그런데 며느리는 자기일 때문에 너무 바빠. 나는 이해를 못했고 1년반 만에 며느리라는 짐을 지우지 않겠다고 생각하게 됐지.
-그게 이해니? 포기지. 네 며느리 잘났어. 너 섭섭함도 많이 느꼈잖아.
-너 며느리 들어올 때 한 것 봐. 아파트 사주고 세간살이에 장롱엔 색색이 스커트와 티셔츠가 뭐야.
|
-우리 며느리좀 봐. “저라도 싫겠어요” 하잖아. 우리들이야 시어머니가 그렇게 하면 감지덕지했지.
-며느리와 처음 대면하는 날, 한참 기다렸는데 며느리는 또박또박 걸어와 목례하고 사뿐이 앉는 거야. ‘앉아라’ 하지도 않았는데. 같이 나간 노처녀 딸에게는 ‘애인 없으세요’ 하데. 어찌나 당돌하고 맹랑하게 느껴졌는지. 근데 걔가 시원시원하고 좋아.
▼아들, 나의 아들
-아들네서 잤는데 토스트를 먹고 출근하는 아들을 보고 너무 놀랐어. 빵을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당연한 듯 했어.
-우린 밥 먹여 보내려고 애와 씨름하면서 새벽에 깨웠잖아.
-내 친정어머니가 아들 내외 보고 ‘저년이 지 서방 머슴 부리듯 하는구나’ 하기에 ‘쉿’ 하고 말렸지. ‘머슴처럼 해야죠. 그렇게 안해서 내 영감은 이제 내 구박 받잖아요’라면서.
-아들이 40이 넘었어도 뒷모습을 보면 눈물이 흐르지 않을 때가 없어. 며느리가 알면 끔찍할 테지. 왜 아들이 가여운지 모르겠어. 가장이라는 짐도 무거워 보이고.
-며느리에겐 그런 감정 없잖아. 솔직히 가슴이 쏴하는 그런 느낌 말이야.
-아들이 불쌍해.
-며느리도 불쌍해.
-며느리가 뭐가 불쌍해. 며느리가 아들에게 잘못할 땐 섭섭해.
▼며느리살이
-1년간 며느리랑 살아봤어.
-난 20일.
-영감 생일에 친정어머니 생신까지 치른 뒤여서 내 생일엔 여행을 갔지. 돌아오니 집안 분위기가 달라. 평소대로 ‘오늘 뭐 해 먹었니’ 하고 물었더니 며느리가 “아드님 굶기지 않았어요” 하데. 방문을 쾅 닫고 들어와 버렸지. 며느리가 들어와 무릎 꿇고 ‘잘못했습니다’라고 해. 미련한 녀석. 아들놈이 며느리에게 “네가 기분 나쁘게 해서 어머니가 여행가셨다”고 한 거야.
-아이들이 우리 내외를 모시겠다고 하데. 내가 불편하니 싫다고 했어. 요즘은 아파트 생활인데. 그래도 우리는 한옥이었잖아. 영감은 솔깃한 것 같아. 모호한 태도를 취해. 그래서 내가 쐐기를 박았어.‘여름에 팬티 바람으로 거실에 못 나와요’ 하고.
▼세대차이
-요즘 며느리 노릇 얼마나 쉬워. 시에미가 돈을 달라고 해, 일을 부려먹어? 명절 때 얼굴이나 보여주고 부엌에 들어와 ‘어머니 맛있어요’ 하면 어리석은 시어머니들이 그리도 좋아하는데….
-우리 생각이야. 며느리 입장에선 돈 몇푼 주더라도 잘난 척 안하는 시어머니가 나을 거야.
-아들이나 며느리나 똑같이 직장 나가는데 밤에 아들놈이 일어나 손주 기저귀 갈아주데.
-그렇게 생각하면 사위도 마찬가지지.
-장모 입장에서는 좋은 것이고.
-요즘 사랑받는 시어머니의 조건은 김치를 담가주는 것에서 더 나가 말없이 김치통을 아파트 경비실에 맡기고 집에 와 전화하는 거랬지.
-아냐. 김치가 자꾸 시어서 귀찮으니까 보내지 말라는 거야.
▼며느리의 시집
-가족모임에서 ‘친구들이 요즘 골프바람이 들어 대화에도 끼지 못하겠어’ 했는데 며느리가 ‘저도 그래요, 어머니. 제 친구들 다 치는데…’라고 해. 무심코 넘겼는데 잠시 후 딸이 뼈가 있는 말이었다고 설명해 주더라고. 내가 이렇게 둔하다니까.
큰아들이 8월에 미국대학에 교수로 가기로 돼 있어. 친지모임에서 모두들 ‘얘가 여기 있어도 총장까지는 할 텐데 그 재미없는 곳에 왜 가느냐’고 했는데 내가 맞장구를 쳤어. 바로 그 때 며느리가 고개를 푹 숙이더라고 딸이 귀띔하데.
-식구들 잔치에 며느리 각자 음식 해오라고 분담을 시켰지. 그러나 외식했으면 하는 눈치야. 그래서 내 생일엔 내가 초대한다고 했지.
-선수쳤구나. 앞으로 걱정이야. 친정어머니가 89세인데 생일 차려먹는 것도 지긋지긋하다고 하셔.
-잔치 즐겁잖아.
-며느리는 안 즐거워.
▼손님, 그래도 바라는 것
-예전에야 며느리에게 엄하게 굴면서 내 식구 만들려고 했지. 그러나 요즘 그런 시어머니가 어디 있어.
-시어머니 뿔달린 것 아닌데.
-직접 살림을 시키지는 않는다 해도 마음속 깊이 기대하는 것 있잖아. 늦게 들어온 시동생 밥 먹었는지 챙기길 바라고 그래도 자꾸 어버이날인데 하는 생각이 들어. 아무리 신식이라고 해도. 그 최소한의 기대도 깨부수고 손님으로 취급해야 할 것 같아.
-손님에게 뭘 바래.
-옛날 시어머니처럼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다 주지 말아야 돼. 그렇게 안하니까 네가 상처 받았잖아.
-너무 자세히 알 필요는 없지만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가끔 얘기해줬으면 좋겠어.
-직장여성이라고 자신의 일을 가족을 등한히 하는 구실로 삼지 말았으면 좋겠어.
김진경 기자 kjk9@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