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 ‘봉선화’ 작곡자인 김형준의 딸로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난 김씨는 부친의 영향으로 8세 때부터 오르간을 배우기 시작해 건반과 친해지기 시작했으며 이화고등여학교(현 이화여고) 재학시절부터 본격적인 피아노 수업을 시작했다. 졸업 후 일본 도쿄고등음악원에 유학해 훗날 남편이 된 난파 홍영후의 조카 홍성유(바이올리니스트) 및 첼리스트 겸 작곡가 안익태 등과 함께 수학했다.
도쿄고등음악원 졸업 후 귀국해 이화여전 교수로 취임한 그는 이렇다할 연주가가 드물었던 1930년대 한국 피아노계의 대표적 연주자로 자리잡았으며 솔리스트 활동 외에도 홍난파의 바이올린 연주회나 현제명 독창회 등 당대 대표적 음악가들의 리사이틀을 반주해 성가를 높였다. 특히 그는 처음 대하는 악보도 그 자리에서 소화해 연주하는 초견(初見)연주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 주위를 감탄하게 했다.
광복되기 전 경성음대로 자리를 옮긴 그는 해방 직후 설립된 서울대 음대 교수로 취임했다. 그의 교육방법은 타건(打鍵)과 음색의 섬세한 관계를 중시하는,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며 조금의 게으름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의 애제자인 변화경(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은 “레슨에 있어서는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으며 준비가 미흡할 때는 학교 가기 싫을 정도로 무서운 면모를 보였으나 그 덕에 기본기를 충실히 닦은 학생들이 유학 후의 치열한 경쟁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정년 후에도 서울대 명예교수로 재직하면서 후진 양성과 연주 활동을 그치지 않았고, 최근까지 2년마다 한 번씩 제자들과 콘서트를 가져 노년에도 왕성한 음악혼을 과시했다. 1996년에는 제자 변화경 및 변화경의 제자 백혜선과 ‘스승-제자 3대 콘서트’를 가져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2000년에 이어 올해 열릴 예정이던 사제음악회는 그의 건강악화로 끝내 열리지 못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