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복을 빕니다]피아노의 代母 김원복씨 후진양성 헌신

  • 입력 2002년 4월 30일 18시 15분


29일 94세를 일기로 타계한 원로 피아니스트 김원복씨는 여명기의 한국 피아노계에 큰 족적을 남긴 연주가이자 평생을 후진 양성에 헌신한 ‘피아노 교육의 대모’로 꼽힌다. 그가 서울대에서 30여년간 재직하면서 길러낸 백낙호 김정규 김형규 김명진 고중원 등 제자들은 백혜선(서울대 교수)을 필두로 그들이 길러낸 제3세대 연주자들과 함께 오늘날 한국 피아노계의 주류로서 가장 뚜렷한 학맥을 형성하고 있다.

가곡 ‘봉선화’ 작곡자인 김형준의 딸로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난 김씨는 부친의 영향으로 8세 때부터 오르간을 배우기 시작해 건반과 친해지기 시작했으며 이화고등여학교(현 이화여고) 재학시절부터 본격적인 피아노 수업을 시작했다. 졸업 후 일본 도쿄고등음악원에 유학해 훗날 남편이 된 난파 홍영후의 조카 홍성유(바이올리니스트) 및 첼리스트 겸 작곡가 안익태 등과 함께 수학했다.

도쿄고등음악원 졸업 후 귀국해 이화여전 교수로 취임한 그는 이렇다할 연주가가 드물었던 1930년대 한국 피아노계의 대표적 연주자로 자리잡았으며 솔리스트 활동 외에도 홍난파의 바이올린 연주회나 현제명 독창회 등 당대 대표적 음악가들의 리사이틀을 반주해 성가를 높였다. 특히 그는 처음 대하는 악보도 그 자리에서 소화해 연주하는 초견(初見)연주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 주위를 감탄하게 했다.

광복되기 전 경성음대로 자리를 옮긴 그는 해방 직후 설립된 서울대 음대 교수로 취임했다. 그의 교육방법은 타건(打鍵)과 음색의 섬세한 관계를 중시하는,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며 조금의 게으름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의 애제자인 변화경(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은 “레슨에 있어서는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으며 준비가 미흡할 때는 학교 가기 싫을 정도로 무서운 면모를 보였으나 그 덕에 기본기를 충실히 닦은 학생들이 유학 후의 치열한 경쟁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정년 후에도 서울대 명예교수로 재직하면서 후진 양성과 연주 활동을 그치지 않았고, 최근까지 2년마다 한 번씩 제자들과 콘서트를 가져 노년에도 왕성한 음악혼을 과시했다. 1996년에는 제자 변화경 및 변화경의 제자 백혜선과 ‘스승-제자 3대 콘서트’를 가져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2000년에 이어 올해 열릴 예정이던 사제음악회는 그의 건강악화로 끝내 열리지 못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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