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엘리자베스2세 英여왕 즉위 50주년…'보통할머니같은 하루'

  • 동아일보
  • 입력 2002년 5월 2일 14시 59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옆집 할머니’ 같은 면이 많다. 웬만해서는 저녁에 TV시청을 거르지 않는다. 제2차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시트콤 ‘아버지의 군대(Dad’s Army)’가 시작될 때면 다른 일은 제쳐두고 TV 앞에 앉는다. 한국의 ‘사건 25시’쯤 되는 BBC의 ‘크라임워치’를 비롯해 탐정, 수사물들도 여왕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이다. 여왕은 대개 자정쯤에 잠이 든다. 요즘도 때때로 20년 전의 마이클 페이건이 떠올라 침대 밑의 비상벨이 잘 있나 손을 가져다 대보곤 한다. 페이건은 1982년 버킹엄궁 안의 여왕 침실에 무단침입해 ‘여왕은 나와 사랑에 빠졌다’고 외쳤던 정신질환자다.

하이드파크의 신록에 물이 오르면 런던은 빛난다. 올해는 유난히 더 온 도시에 활기가 넘친다. 바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50주년을 축하하는 골든 주벌리(Golden Jubilee) 행사 때문. 여왕이 아버지 조지 6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은 1952년 2월 6일. 그러나 이 날은 선왕의 기일이기도 해 버킹엄궁에서의 대규모 콘서트 등 축하행사는 늦봄 이후로 옮겨졌다. 6월 1∼4일은 아예 골든 주벌리 휴가주간으로 공표됐다.

정작 잔치의 주인공인 엘리자베스 2세는 이 유쾌한 소동 가운데서도 평소 스케줄을 지키며 정중동하고 있다. 단순, 간결은 그녀의 스타일이다. 버킹엄궁의 위임을 받아 여왕의 전기 '로열(Royal)'을 쓰고 있는 작가 로버트 레이시를 만나 여왕의 24시간에 대해 들었다.

여왕의 일과는 오전 8시쯤 시작된다. 아침 식탁에는 말 그대로 ‘잉글리시 브랙퍼스트’가 등장한다. 계란 스크램블, 베이컨 등이 함께 나오지만 언제나 여왕의 1순위는 갓 구운 토스트에 버터와 오렌지 잼을 곁들여 먹는 것이다. 이 시간쯤 버킹엄궁 안에서는 ‘스코틀랜드 백파이프악단’이 백파이프를 연주한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부터의 전통이다. 여왕은 연주를 들으며 머릿속의 시계바늘을 오전 9시에 맞춘다. 전통 홍차 ‘얼그레이’를 마시면서 아침 신문 몇 개를 뒤적이는데, 오랜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가십 등 흥밋거리 기사가 많은 타블로이드판 신문들이다.

식사를 마치면 여왕은 손수 기르는 5마리의 개를 데리고 버킹엄궁의 정원을 산책한다. 개 기르기는 경마와 함께 여왕의 중요한 취미생활 중 하나다. ‘피핀’ ‘듀기’ 등 개들의 이름을 번갈아 부르면서 쇠고기나 그레비 비스킷을 던져준다. 여왕이 기르는 도기종(種)은 왕족의 혈통을 타고 태어났다. 여왕은 원래 몸집이 더 작은 코기종을 길렀지만 몇해 전 이 개를 동생 마거릿 공주의 닥슨종 개와 교배시켜 ‘도기’종을 만들었다.

여왕에게는 더없이 충실한 개들이지만 2명의 수행비서들에게는 항상 골칫거리다. 여왕이 나타나기 전에는 시도 때도 없이 짖어대고 여왕 말고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아 비서들은 ‘더러운 성질’이라고 악평한다. 그들은 이따금씩 여왕 몰래 개밥에 위스키를 타서 개를 재우기도 한다.

오전에는 편지 읽는 시간이 많다. 매일 300여통의 편지가 세계 각국에서 온다. 한국에서도 적잖은 편지가 오며, 유럽과 미국 외에 아프리카나 인도에서도 많은 편지가 온다. 공식적인 초청의뢰나 감사의 편지가 대부분이지만 단순한 고민상담이나 형무소에서 온 것, 정신질환자가 보낸 것들도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비서들은 ‘발신상태가 양호한’ 편지 중에 10통을 추려준다. 여왕의 친구나 가족들이 보낸 편지는 겉봉에 특별한 표시를 해서 보내기 때문에 빠짐없이 전달받는다.

여왕이 가장 애착을 갖는 행사는 일주일에 한번씩(대체로 금요일) 있는 ‘메달수여식’이다. 선행을 베푼 사람, 사회에 모범이 되는 사람, 역경을 딛고 일어선 장애인, 성공한 운동선수 등 각계의 다양한 사람들을 버킹엄궁으로 초청하거나, 직접 현장으로 가서 메달을 준다.

비서들은 때로 100명이 넘는 사람들의 명단과 해당 인물마다 두가지씩의 질문이 적혀있는 종이를 여왕에게 건네준다. 질문의 형식은 매우 정교하고 감동적이다. “지난 주에 브리스톨에 갔더니 온통 선생이 불난 집에서 소녀를 구해낸 얘기뿐이더군요. 그것이 영국인의 진정한 용기라고 생각하십니까?”처럼, 자세하게 서술형태로 돼 있다. 여왕은 밑줄을 그어가며 질문지를 숙지하고 메달을 받을 사람의 이름과 선행의 덕목을 연결해서 외우고는 자신의 의견을 더한다.

매주 화요일 오후 7시에는 토니 블레어 총리가 버킹엄궁으로 와서 국정 현안에 대해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다분히 상징적인 회동을 갖는다. 여왕은 대부분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며, 하고 싶은 얘기가 있을 때는 완곡하게 돌려 말한다. 9·11테러 이후 계속되는 영국군의 아프가니스탄 참전에 대해 여왕은 “땅에서는 잘하고 있군요(Well, ground is good)”이라며 육군을 칭찬했다. 그녀는 별다른 사안이 없을 때 이따금씩 주요 정치인들에 대한 성대모사를 하는 ‘개인기’를 발휘해 블레어 총리를 웃겨주기도 한다.

4세 때부터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웃어야 하나’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그녀는 세계 각국의 외교사절을 만날 때도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이끌기로 유명하다. 버킹엄궁 정원에서 손수 뽑은 꽃을 크리스털 박스에 담아 선물로 주면 특히 남성 외교사절들은 미팅에 나온 소년처럼 수줍게 미소를 흘린다.



오후에 특별한 스케줄이 없으면 그녀는 경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레이싱 포스트’나 ‘스포팅 뉴스’ 등 경마뉴스를 다룬 신문 잡지를 펴 놓고 어떤 말이 좋은지를 탐색한다. 자신은 경마에 돈을 걸지 않지만 친지들이 전화를 걸어오면 어떤 말의 상태가 좋아보이는지, 어느 말에 베팅을 해야 돈을 딸 수 있을지에 관해 충분히 상담해 준다. 자국민들의 시선 때문에 망설이고 있지만, 그녀는 최근들어 여러 방면에서 최고라는 평을 듣는 아일랜드산 말을 기르고 싶어한다. 경마장에도 자주 가고 싶지만 워낙에 ‘로열 박스’를 싫어하는 그녀의 성미 때문에 웬만해서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저녁 때면 가끔씩 친구들을 버킹엄궁으로 초대한다. 학교를 다니지 않고 가정교사에게서 수업을 받았던 터라 그녀에게 동창생들은 없지만, 어린 시절 ‘귀족 모임’에서 만났던 또래의 70대 중반 여인들이 그녀의 친구들이다. 카푸치노와 와인 대신 미네랄 워터를 마시며, BMW승용차 대신 이름모를 낡은 소형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철저히 지킨다. 여왕은 이들과 어울려 ‘지그소 퍼즐(조각 맞추기 게임)’을 즐기고 가끔 마티니를 한 잔씩 한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바이올린을 켜거나, ‘사운드 오브 뮤직’의 대사를 셔레이즈(일종의 마임)로 사람들 앞에서 연기해 보인다. 흉내내기에 능한 그녀 앞에서 배꼽을 빼지 않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녀는 외출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옷 입는 것에 대해서도 실상 큰 관심은 없다. 모자를 좋아한다는 말도 와전된 것이다. 3월30일 서거한 여왕의 모후가 모자를 좋아해 여러 가지 모자를 많이 모아 놓았을 뿐이다. 언제나 심플하고 밝은 색상의 투피스, 핸드백, 모자, 스카프를 걸치는 것이 ‘격식있는 옷차림’이라 생각하고 그대로 실천한다. 주황색 노란색 파란색을 좋아한다. 베이지색이나 갈색계통은 ‘호소력이 없는 것 같아’ 꺼린다.

요즘 그녀가 가족들에게 자주 하는 말은 “내가 그렇게 구식은 아니야(I’m not old-fashioned enough)”이다.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 파커 볼스의 관계가 진전되고 있는 것을 지켜보며 은근히 재혼이 성사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주변인들에게 넌지시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보다는 카밀라가 더 좋다”는 말을 건네고 있다. 여왕이 볼스를 좋아하는 주요한 이유는 볼스가 승마와 경마를 좋아하고, 개를 귀여워하며, 무엇보다 틈만 나면 영국민들에 대한 애정을 말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런던〓조인직 기자 cij19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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