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뉘앙스’라는 것 때문에, 외국어를 공부하는 일은 어렵다. ‘늙은이’와 ‘노인’의 어감 차이를 외국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단순히 직역해서는 정확한 의미의 차이를 파악하기 힘든 영어 단어들도 많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disease’와 ‘illness’라는 단어이다. 사전에는 똑같이 ‘질병’ 등으로 풀이되어 있는 이 두 단어가 정확하게 어떻게 다른지를 알게 된 것은 내가 의학을 공부하고 난 이후였다.
간단히 말하면, 전자는 폐렴이나 위암처럼 이름이 붙은 질병 그 자체를 뜻하고 후자는 사람이나 다른 생명체가 어떤 질병으로 ‘앓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때문에 많은 번역자들은 ‘illness’라는 단어를 번역하는 데에 골치를 ‘앓는다’.
지금의 의학 교과서에 ‘disease’라는 단어는 수없이 여러 번 나오지만, ‘illness’라는 단어는 그렇게 자주 쓰이지 않는다. 의사들이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보다는 질병이라고 하는 대상을 제거하는 데에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져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처럼 ‘disease’에만 주된 관심을 기울여 온 현대 의학이 이제는 ‘illness’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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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주장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세포 혹은 분자 수준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현대 의학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고, 의사에게는 질병에 대한 지식이나 기술 못지 않게 ‘인간에 대한 통찰’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도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여러 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 우선 임상의사인 동시에 의료 윤리학자인 저자가 매우 다양하고도 생생한 사례들을 나열하면서 현대 의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윤리가 그러하듯 의료 윤리에 있어서도 철학적 담론만으로는 현실을 전혀 바꿀 수 없다.
따라서 훨씬 우아하지만 공허하기 짝이 없는 당위론에 비하면, 의료현장에서 누구나 한번쯤 고민했을 법한 현실적 문제들을 다룬 이 책의 효용이 더 크다.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현대 의학의 장점까지 부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비인간적이라는 이유로, 현대 의학 전체를 거부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담고 있는 책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공장의 문을 닫을 수는 없는 것처럼, 현대 의학이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다고 해서 그 한계선 안쪽에 놓여 있는 효용까지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 포용적인 태도를 내내 견지하며,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이익과 보람을 줄 수 있는 개선책을 모색하고 있는 저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 책을 읽어야 할 일차적 대상은 의사를 비롯한 모든 의료인 및 해당 분야를 전공하는 대학생들이다. 그리고 의료의 사회학적·철학적·윤리적 측면에 대해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특히 환자-의사 관계를 다룬 제5장과 제9장은 의과대학에서 교재로 활용해야 마땅할 만큼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다.
책의 내용과 정확하게 부합되는 원제 ‘고통의 본질과 의학의 목적’을 부제로 내리는 대신 조금은 선정적인 한글 제목을 붙인 점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치과의사이사 의철학자인 역자의 번역은 깔끔하고 오류가 없다. 원제 The Nature of Suffering and the Goals of Medicine(2002)
박재영 의사·‘청년의사’ 편집주간
medicaljournalist@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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