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텍스트의 포도밭’(1993)은 중세의 책과 독서법에 대한 그만의 통찰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텍스트라는 말은 포도덩굴에서 유래했으며, 책을 읽는 것은 정신이 ‘취하는’ 것이었다는 그의 생각은 얼마나 놀라운가. 독서 또한 사위(四圍)가 고요한 가운데 영혼의 심연을 향해 떠나는 순례 여행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생각은 전 세계가 하나의 정보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정보화 시대에 은근히 딴지를 거는 듯하다.
일리치는 이미 ‘병원이 병을 만든다’, ‘학교가 교육을 망친다’라는 명제를 통해 가장 현대적인 것의 반현대성을 폭로하는 등 철저한 반골 기질을 유감 없이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근대에서 중세로 훌쩍 넘어간 이 책에 들어 있는 그의 발언은 정보가 흘러 넘치다 못해 쓰레기가 되어 폭격처럼 쏟아지는 이 시대에 여러 울림으로 다가온다.
중세에는 ‘책〓포도밭’ 속에서 세계와 신과 일체가 되도록 취하는 일이 글의 목적이었지만 예를 들어 지금 나의 글은 쓰레기 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뮈는 장 그르니에의 ‘섬’(민음사·2000)을 읽고 영혼이 취했던 스무 살의 어느 날 저녁을 추억한다. 나도 한 때 ‘공자의 생활난’이라는 김수영의 명제에 오랫동안 생각이 붙잡혀 있던 적이 있다. 이상하게도 화려한 이념과 가난한 현실의 대비처럼 읽힌 이 말은 ‘모더니즘의 생활난’이라고 바꿔도 하등 문제가 없었다.
가난한 현실과 모더니즘이라는 서구 최첨단 이론 간의 처절한 불균형. 이처럼 그의 시집에는 한 마디 말로 천하를 정리하는 그의 도저한 사유가 곳곳에 저장되어 있다. 그래서 김현은 이광수를 두고 만지면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라고 했지만 김수영은 만지면 만질수록 빛나는 시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 그의 시집을 읽으면서 슬픈 현실을 그래도 온몸으로 뚫고 가자는 그의 말에 마음이 데이지 않은 문학청년은 드물 것이다.
이처럼 독서는 영혼을 취하게 하고 마음을 붙잡고 정신이 말의 불에 데이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e메일로 온 10개의 편지 중 6개는 대략 ‘화끈’, ‘죽인다’, ‘싸다’,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면 당신도…’이다. 나머지 4개만 먼 곳에 있는 친구로부터 온 것이다. 그래서 요즘 나의 독서법은 ‘뒤로 돌아가’ 쪽에 가깝다. 즉 아직 지식이 정보로 세련되게 재가공되지, 상품화되지 않았을 때의 책을 골라들고 있다.
정말 몇 년만에 다시 김수영의 산문과 시의 여기저기를 기웃기웃거려 보기도 하며, 지금은 대가로 불리는 시인들의 데뷔 시집을 들추어본다. 그리고 마음이 쓸쓸해질 때면 호이징가의 ‘중세의 가을’(문학과지성사·1999)을 몇 페이지씩 넘기며 제법 고급스런 낭만과 감상에 빨려 들어가 보기도 한다. 아마 사람을 빨아들이는, 취하게 하는 중독성에서 이만한 책도 없을 것이다. 술에 대취한 다음 날은 지옥의 연장이지만 책에 만취한 날은 그래도 정보라는 미신에 취해 이 세상이 맑게 보이지 않을까.
조형준(문학평론가·새물결출판사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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