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기타]'詩會의 꽃'에서 뒷골목 매춘까지 '말하는 꽃 기생'

  • 입력 2002년 5월 24일 17시 57분


말하는 꽃 기생/가와무라 미나토 지음 유재순 옮김/343쪽 1만원 소담출판사

모란꽃이 만발한 정원을 산책하고 있는 당나라 현종에게 신하가 물었다. “어떤 꽃이 가장 아름답습니까?” 당 현종은 “해어화(解語花)”라고 답했다. ‘말을 알아듣는 꽃’이란 뜻의 해어화. 그가 깊게 사랑하는 양귀비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 후로 해어화는 기생, 기녀의 별칭이 되었다는 얘기.

해어화와 기생. 시(詩) 서(書) 화(畵)를 알고 즐겼다던 과거의 ‘말을 알아듣는 꽃’과 오늘날 우리 머릿속의 ‘기생’은 사뭇 다른 존재로 다가온다. 2002년의 ‘기생’이라는 단어는 차라리 무미건조하다. 입가에 경련을 일으킬 것 같은 고정된 미소와 바삭거리는 한복 또는 치렁치렁한 드레스…. 대도시 어디나 있는 공공연하고도 은밀한 사창가의 모습까지 오버랩된다면 ‘오버’일까. 다른 가지를 뻗어나게 했지만, 정치적 사회적 제도적인 지배와 종속이라는 뿌리는 과거나 현재나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 아닌가.

호세이대 국제문화학부 교수인 저자는 일제강점기 국학자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1927) 등 여러 역사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문학사적 사회학적 분석을 곁들여 ‘기생’이라는 꽁꽁 묶인 실타래를 풀어간다.

일본인 교수가 쓴 ‘기생 이야기’라, 행여 흥미 위주로 시선을 고정하거나 비하할 수도 있을 거라는 걱정은 접어둬도 좋다. 되도록 편견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서술하려는 노력이 책 곳곳에 스며 있다. 그러나 저자가 미국의 여성 사회학자가 쓴 ‘게이샤’를 보고 부끄러움과 분노를 느꼈던 것처럼, 일본인이 쓴 ‘기생사’를 읽는 한국인인 우리도 그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될 듯도 싶다.

문학을 알고 예술을 즐길줄 알았던 역사 속의 '기생(妓生)'. 오늘날 기생이란 단어의 의미는 옛날과는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과거와 현대의 '기생 시스템'은 모두 지배의 한 형태로, 인간이 인간을 속박하는 하나의 제도이자 억압적인 문화에 지나지 않는다.

기생의 기원부터 시대의 흐름에 따른 기생의 여러 역할과 목적, 예술 작품 속에 비친 기생, 기생의 문화까지 일본과 한국을 넘나들며 저자가 꼼꼼하게 다루고 있는 폭넓은 내용을 좇아가다보면 우리 문화, 우리 것에 무지했던, 또 심지어 무시했던 것에 뜨끔해진다.

시기(詩妓) 황진이 소춘풍 등을 비롯해 인생의 길가에 서 있는 존재로서 기생들이 남긴 애절한 문장이 가슴을 울린다. 계생(桂生), 계양(桂孃)이라는 기명을 가지고 있는 이매창의 시조를 보자. ‘내 정령(精靈) 술에 섞여 님의 속에 흘러들어/ 구곡간장을 마디마디 찾아가며/ 날 잊고 님 향한 마음을 다스리려 하노라.’

19세기 중기 방랑시인 김삿갓이 부여의 한 기생과 주고받았던 시를 살펴보면, 상대 기생의 풍류와 시에 대한 ‘내공’도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김삿갓: 백마강 부근에서 송아지가 음매 음매/기생: 노인산 기슭에서 아이가 터벅터벅/김삿갓: 집을 나온 것은 정월 지금은 삼월/기생: 손님을 만난 것은 초저녁 무렵 지금은 세 시/ 김삿갓: 연못의 부용은 깊게 피어 있어 보이지가 않네/기생: 뜰의 복숭아는 소리 없이 웃고 있네/김삿갓: 지금 초저녁의 즐거움을 무엇에 견줄 수 있을까/기생: 자오산 봉우리의 밝은 달보다 더 즐거운.’

저자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현대로 돌아와 글을 마무리한다. 매매춘, 윤락행위, 원조교제가 얽혀든 ‘현대 기생’의 얼룩진 거울을 치켜들며.

“‘기생’이 과거의 것이 되어버렸다고는 해도, 그 무언(無言)의 ‘말하는 꽃’들의 역사가 망각된 채로 영원히, 혹은 완전히 잊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집은 손가락에, 일상의 한 부분을 천착해 온 한 일본인의 끈질긴 집념이 배어나왔다. 부분부분 채색된 어느 뒷골목을 천천히 돌아보고 나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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