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때 밀라레빠의 삶을 다룬 영문소설을 번역하며 소일한 적이 있었다. 기억나는 것은 집안이 몰락한 뒤, 천신만고 끝에 흑마술을 배운 밀라레빠가 재산을 빼앗아간 백부와 친척들에게 복수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장면이 얼마나 많은 쾌감을 주는지 모른다.
복수에 성공해서? 아니다. 그 부분에서 밀라레빠는 화를 제대로 내고 있기 때문이다.
스콧 펙의 베스트셀러인 ‘끝나지 않은 길’을 보면 “모든 어린이는 신경증환자”라는 말이 나온다. 이해할 수 없는 일에 화를 내는 게 정당한데도 아이의 화를 올바르게 받아주는 부모가 거의 없는 탓이다. 되레 공개적으로 화를 표현하는 일은 삼가해야 할 일로 여겨진다. 그렇게 성장하게 되면 다들 화내는 일을 힘들어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모든 신경증은 정당한 고통을 회피한 대가다”라는 칼 융의 말처럼 다들 신경증환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화를 내려고 밀라레빠처럼 흑마술을 배울 필요는 없다. 정당한 대상을 찾아 정당하게 분노하기만 하면 된다.
김형경의 소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에 등장하는 주인공 세진이 마지막으로 찾아내는 분노의 대상은 바로 어머니다.
“무의식 속의 그 아기가 기억하는 불편과 고통을 성인인 내가 아직도 고스란히 느낀다는 점이었다. 결국 나는 유년의 그 지점으로부터 한 걸음도 옮겨 디디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세진은 말한다. 성장하기 위해 세진은 아기의 입장에서 엄마에게 화를 낸다.
‘화가 풀린다’는 것, 그건 바로 뭉쳐있던 콤플렉스가 풀린다는 뜻이다.
최근에 나온 유미리의 ‘세상의 균열과 혼의 공백’을 보니 ‘작가의 말’에 “이 책 속에서 나는 화를 내고 있다. 분노의 감정으로 한 줄 한 줄 써나갔다”고 씌어져 있었다. 이 책에서 유미리는 자신의 핏줄을, 오키나와를, 자신의 소설을 위해 화를 참지 않는다.
오래 전 밀라레빠의 우주적인 화를 보면서 쾌감을 느꼈던 것처럼 유미리의 분노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유미리가 미혼모로 아이를 낳은 뒤로 나는 그녀가 대책 없이 좋아졌다.
그 몇 년 전 ‘엄마에 대한 복수,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란 글까지 쓴 적이 있는 사람이라 놀랍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게 어떤 느낌일지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다. 밀라레빠처럼 유미리도 있는 힘껏 화를 낸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화를 통해 성장한다는 점이다. 복수를 끝낸 뒤, 진리의 길을 나선 밀라레빠처럼.
소설가 larvatus@ne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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