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오후 4시.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 특별대국실에선 이창호 9단과 안조영 7단이 마지막 공력을 쏟아내고 있었다. 제36기 국민패스카드배 패왕전 도전 3국.
1, 2차전 모두 반집으로 승부가 갈렸다. 이 9단의 2연승. 특히 2국에선 모든 기사들이 마지막까지 ‘안 7단의 반집승’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 9단이 ‘반집 패’ 2개를 모두 이기는 묘수를 터뜨리며 승패를 바꿔 놓았다. 안 7단은 국후 “반집을 진 것보다 그런 바둑을 역전당한 게 억울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안 7단은 이 9단에게 7전 전패를 당했다. 거기다 두번 연속 반집패를 당하면 힘이 쪽 빠질 만도 하지만 그의 얼굴엔 한판은 꼭 건지겠다는 의지가 분명했다. 이젠 타이틀이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였다.
장면도에서 누구나 흑의 다음 수로 백 4의 곳을 예상하고 있었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가장 큰 곳이며 여길 두면 흑이 집으로 크게 앞서게 된다. 하지만 이 9단은 당연한 수에 지루하게 뜸을 들이고 있었다. 이윽고 흑 1.
인터넷 중계를 하던 양재호 9단은 이 수의 의미를 검토하더니 ‘이 9단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수’라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흑 1을 게을리 하면 단단해 보이는 하변 흑진에서 A와 B의 선수를 바탕으로 ‘가’까지 쳐들어가 살아버리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흑 1은 이른바 큰 곳보다 급한 곳. 백이 2로 침입해 집으론 미세해졌지만 승부의 물꼬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이 9단의 혜안이었다. 그는 한판의 운명을 꿰뚫고 있었다.
백 4까지 귀를 빼앗긴 흑은 또다시 긴 장고에 빠졌다. 흑 5. 이 역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수였다. 검토실은 벌떼처럼 시끄러워졌다. ‘수가 안난다면 명백한 2집 손해’라는 의견이 분분했다.
안 7단 역시 장고에 들어갔다. 뒷맛이 나쁘기 때문에 ‘나’로 물러서면 안전하다. 하지만 백 6이라면 2집 이득. 승부를 백쪽으로 확실히 뒤집을 수도 있다. 2번 연속 반집패의 악령에 시달렸던 안 7단은 눈을 질끈 감고 백 7을 두드렸다.
그러나 ‘2집 이득’이 안 7단의 발목을 잡았다. 이 9단은 상변을 깨끗하게 정비한 뒤 완벽한 수순으로 우하귀에서 수를 내버렸다. 217수만에 흑 불계승.
안 7단은 이번 도전기에서 이 9단에 비해 결코 밀리지 않는 기량을 보여주었다. 안 7단은 가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이 9단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인함을 보여줬다. 하지만 마지막에서 승부를 낚아채는 힘, 그것이 이 9단에 비해 부족했다.
이 9단은 대국후 인터뷰에서 “3판 모두 좋지 않고 실수가 많은 바둑이었다. 이겨서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겼다. 판세가 유리하든 불리하든, 그는 강하다.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