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속에 들어가 숨쉬면서 크는거지. 제작자가 감독을 키운다는 말이 있지만 난 그게 아니라고 생각해. 감독이 제작자를, 배우를, 스태프를 키우는거야.”
임권택감독에게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안겨준 영화 ‘취화선’의 제작자인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64).
28일 ‘개선’한 이 사장은 여독이 채 풀리지 않은 29일 낮 12시 임권택 감독(66), 정일성 촬영감독(73)과 함께 인터뷰 장소인 광화문 일민미술관내 카페 imA에 들어서면서 “2년전 영화 ‘춘향뎐’으로 칸의 레드 카펫을 밟아 꿈이 시작됐고 이번에 임 감독의 감독상 수상으로 마침내 그 꿈이 실현됐다”고 감회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영화판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언제나 감독과 배우의 몫이고, 땀과 눈물로 얼룩진 ‘그림자 인생’은 제작자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특유의 배짱과 카리스마로 대(大)감독 못지 않은 예우를 받으며 충무로의 실력자로 군림해온 ‘왕 프러듀서’다.》
‘이태원’이란 이름 석자가 없었다면 93년 한국 영화 최초로 서울 관객 100만을 돌파한 ‘서편제’, 최초의 칸 경쟁 부문 진출작 ‘춘향뎐’,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취화선’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임 감독은 “둘이 처음 만나 찍은 영화가 84년 ‘비구니’였는 데 불교계 반대로 찍다 중단됐으니 참 대단한 ‘악연(惡緣)’”이라며 “하지만 이 사장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 영화 인생은 훨씬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이라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 사장은 80년대이후 ‘장군의 아들’ 시리즈, ‘서편제’의 한국 영화의 ‘흥행 대박’의 주인공이자 ‘태백산맥’ ‘축제’ ‘춘향뎐’ 등 우리 자연과 정서를 담은 영화로 세계 영화계의 문을 두드려온 외로운 승부사이기도 하다. 그는 또 충무로에서 영화 사랑과 의리, 욕의 3절(三絶)로 통한다.
원래 미군 부대의 군납업자였던 그는 73년 친구가 운영하던 의정부의 한 극장을 인수하면서 영화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 바람같이 살면서 벼락처럼 돈을 벌었다는 그는 특유의 뚝심과 사업 수완으로 경기, 강원 지역의 영화 배급을 시작했고 83년에는 부도 직전의 태창영화사를 인수해 태흥영화사를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영화제작에 나선다.
그가 단순히 흥행에만 매달린 제작였다면 한국영화의 ‘대부(代父)’라는 수식어는 붙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돈이 안 된다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우리 영화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남들이 너나할 것 없이 외화 수입에만 매달릴 때 그는 35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했다.
영화계 입문 초기에는 ‘터미네이터’ ‘에일리언’ 등 외화 수입과 배급도 했지만 직배영화 반대운동이 시작되자 외화 수입에서 미련없이 손을 뗐고 스크린쿼터를 지키자는 영화인의 시위 대열에서 선두를 지켰다. 96년 그가 탈세 혐의로 구속되자 영화 담당 기자들이 연명으로 법원에 선처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해 담당 재판부를 놀라게 했다.
93년 영화 ‘서편제’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 오정해는 ‘인간 이태원’을 이렇게 평가한다.
“여배우들은 이태원 사장님의 육두문자와 음담패설에 기겁을 합니다. 저도 한동안은 밥 먹자고 하면 무서워서 도망을 다녔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말씀만 그렇지 행동으로 옮겨본 적이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영화 현장을 누구 보다 사랑하시고, 영화가 끝나도 인간적 정리를 지속하는 몇 안되는 분이죠.”
최근 몇 년동안 흥행부진으로 고생한 이 사장은 지난해 둘째 아들 우승씨(39)가 영화 ‘두사부일체’의 공동 제작과 투자를 맡아 흥행 대박을 터뜨렸지만 “나는 애들 장난 같은 영화로 돈 벌 생각은 없다”고 일축할 정도로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부인 이한숙씨(65)에게는 ‘애처가’를 넘어 ‘공처가’ 수준의 애정을 보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사장은 칸 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하기 전 “이번 영화를 끝으로 난 ‘하산(下山)’하겠다. 이 영화가 상을 타도 하산하고, 상을 못타도 하산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수상 직후에는 “글쎄. 일단 오늘 밤 자고나서 내일 아침에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겠다”고 했다.
29일에는 또 말이 달라졌다.
“아무래도 임감독이 연출을 못할 때까지 내가 옆에서 있어야지. 무슨 하산이야. 또다른 목표가 생기면 다시 올라가야지.”
아무래도 이사장은 칸 영화제 작품상인 황금종려상을 탈 때 까지 임감독을 괴롭힐 생각인 것 같다.
김갑식기자 gskim@donga.com
◆ "칸 감독상 작품보자" 취화선 관객 몰린다
‘칸 특수’ 덕분에 ‘취화선’의 흥행에 파란불이 켜졌다.
10일 개봉했던 ‘취화선’은 이번주로 개봉 3주째에 들어섰다. 일반적으로 개봉 후 3주째는 관객과 상영관 수가 줄어들기 시작해 ‘끝물’에 해당하는 시기. 28일 현재 전국에서 47만4000명이 관람했다.
그러나 28일 칸 영화제에서 임권택감독이 감독상을 수상했다는 ‘낭보’가 전해지면서 관객의 발길이 다시 이어지기 시작, 28일 하루 동안에만 전국에서 2만1000명이 찾았다. 이는 수상 전인 전날 1만4000명과 비교할 때 70% 가까이 늘어난 것.
현재 취화선의 좌석점유율은 평일 기준 54%로 높은 편. 이에따라 배급사인 시네마서비스는 주말인 6월 1일부터 ‘취화선’의 상영관을 현재 45개에서 70개로 확대하기로 했다.
‘취화선’의 홍보마케팅을 맡고 있는 PL기획 송혜선이사는 “칸에서의 수상 소식이 알려진 후 일부 극장에서는 마지막 회까지도 매진이 될 만큼 반응이 좋다”며 “예전에 ‘서편제’ 때도 개봉 후 뒤늦게 입소문이 나기 시작해 폭발적인 흥행으로 이어졌는데 ‘취화선’도 비슷할 것 같다”고 말했다.
강수진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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