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의 본질은 소크라테스적 자아인식이다.” (엄정식 서강대 철학과 교수)
“노동과 놀이, 정신과 신체의 이분법을 극복해야 한다.” (정응근 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
월드컵의 열기가 뜨거운 가운데 학자들이 스포츠를 화두로 철학적 논의를 제기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다음 주 발간되는 계간지 ‘철학과 현실’(철학과현실사) 여름호는 특집 ‘스포츠 철학’을 통해 현대인들을 사로잡고 있는 스포츠의 의미와 문제 및 개선방향 등에 관해 논의한다.
김상환 교수는 ‘스포츠, 근대성 그리고 정치’에서 운동 선수들보다 관중들이 만들어내는 ‘정서적 연대’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축구 경기장의 관중들은 그라운드에서 공을 주고받는 선수들 못지 않게 감정을 주고받는다. 선수들의 절묘한 패스 못지 않은 현란한 감정의 패스가 관중석에서도 일어나면서 관중들은 정서적 연대를 연출한다는 것이다. 관중은 단순히 수동적 관객이 아니라 ‘정념(passion)’의 ‘패스’를 통해 볼을 다투는 선수처럼 두터운 수비벽과 깊숙한 태클을 따돌리는 드리블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스포츠가 권력과 자본에 의해 악용되는 이유를 스포츠의 이런 ‘탁월한 감정의 전이’에서 찾는다. “스포츠는 감정이 전염되고 증폭되기 때문에 그곳에서 강력한 정서적 상호 모방이 일어나고, 그런 상호 모방을 통해 감정이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확대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본과 권력이 이런 전염과 증폭의 장소에 대중을 몰아 넣어 의도된 이익과 목표를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스포츠를 통해 형성되는 감정의 에너지는 정치경제학적 법칙으로 완전히 묶어놓을 수 없을 만큼 역동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김 교수는 권력과 자본이 스포츠를 가지고 술수를 부릴 때도 “정작 도구가 되는 것은 권력과 자본 자체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관중은 단지 스펙터클의 수동적 소비자가 아니다. 그들이 연출하는 상상적 연대는 수동적 연대가 아니라 권력과 자본보다, 어쩌면 관중보다 앞서는 능동적 충동의 실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도 상업도 심지어 스포츠도 그 신비한 연대의 충동을 위해서 봉사하는 위치에 있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엄정식 교수는 스포츠가 형성하는 이런 ‘정념(passion)’에 경계의 눈길을 보낸다. 엄 교수는 ‘스포츠의 철학과 가치론’에서 “스포츠는 본질적으로 즐거움을 주는 신체 운동”이라고 정의하면서, “감각적 생활태도와 관능적 쾌락의 추구가 시대적 특징이 된 물질 문명에서 스포츠도 고유의 기능을 잃고 현대사회의 부정적 요소에 오염돼 있다”고 지적한다.
엄 교수는 이 부정적 요소를 극복하고 스포츠의 고유한 기능 중 하나인 ‘소크라테스적 자아 인식’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절규했듯이, 스포츠를 통해 인간은 능력의 한계를 알 수 있고 그 한계 안에서 경기에 임하는 방법을 배우며, 동시에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도 터득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관능과 쾌락의 추구에 매몰된 스포츠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정응근 교수는 ‘스포츠 철학’이란 주제 아래 현대 스포츠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는 ‘월드컵과 운동 문화’에서 “노동과 놀이가 대립되면서 현대 스포츠는 노동을 잘 하기 위한 도구적 오락으로 전락했고, 정신과 신체의 대립속에서 신체의 움직임으로만 제한됐다”며 이런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야 한다고 역설한다.
스포츠를 하는 것은 단순히 비생산적 시간의 소비를 넘어 “인간이 자기의 주인 자격으로 스스로 가능성을 열어 가는 활동의 자유와 창조의 시간이며, 물리적 신체의 움직임 이상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들은 모두 스포츠가 가진 엄청난 힘에 주목한다. 월드컵 기간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그 힘은 더욱 커질 것이고 그 것을 한국사회와 개개인을 위해서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에 대한 논의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김형찬 기자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