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밑의 모래가 환히 들여다보이는 충북 괴산 화양구곡(華陽九曲)의 금사담(金砂潭) 옆 바위에 새겨진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1607∼1689)의 글이다. 그는 말년에 조정에서 물러나 이곳 금사담 앞의 바위 위에 암서재(巖棲齋)라는 서재를 짓고 머물며 조선의 사림을 움직였다.
창오산은 중국에서 임금을 상징하는 산이고 무이산은 주희(朱熹)가 살던 산이니, 이 글은 청나라 오랑캐로 인해 중화(中華)의 맥이 끊어지고 주자학이 쇠락해 가던 당시의 현실을 한탄한 것이다. 그 옆의 바위에는 ‘충효절의(忠孝節義)’란 글씨도 새겨져 있다. 중화문명이 무너져 가고 있다는 위기감 속에서 그가 끝내 지키고 싶은 뜻을 바위에 깊이 새겨놓은 모양이다. 더구나 이 네 글자는 명나라 태조의 글씨란다.》
학문과 수양을 통해 심신을 닦고 사회의 모범이 되어 현실을 경계하며 이상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것이 사림이라면, 이 화양구곡만큼 어울리는 곳도 없을 것이다. 바위와 바위 사이를 조용히 흐르는 물을 바라보노라면, 투명할 정도로 맑은 물이 도리어 사람의 속내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가슴이 서늘하다. 수양의 장소 치고 이만한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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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송시열은 이론적인 의미에서 깊은 철학을 남긴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성리학을 계승해 예학(禮學)을 발전시킨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과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 부자의 학문을 조선의 정치 현실에서 실천한 사람이다.
조선 건국 후 지식인들은 이론적으로 불교를 비판하며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가꿔갔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던 불교의 풍속을 제거하고 이를 유교적인 것으로 대체하기 위해 예에 관한 책들을 간행했다.
국초부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등 예서가 일반에 보급되면서 일반인들의 관혼상제는 유교적으로 변해 갔다. 주희가 성리학적 관점에서 예를 정리한 ‘주자가례(朱子家禮)’도 조선 선비들 사이에 중요한 예서(禮書)가 됐다. 그러나 이에 만족치 못한 정구, 김장생 등 조선의 예학자들은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 ‘가례집람(家禮輯覽)’ 등 우리의 입장에서 ‘예’를 정리해 냈다. 17세기 송시열의 시대에 예학은 일상으로 깊이 스며들었을 뿐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당시 서인(西人)을 대표하던 송시열은 현종 즉위년(1659)의 제1차 기해예송(己亥禮訟)과 숙종 즉위년(1674)의 제2차 갑인예송(甲寅禮訟)을 통해 윤휴, 허목 등 남인(南人)과 맞서며 왕실의 상례(喪禮)도 일반인들의 예법과 같아야 함을 주장했다. 예송의 승패는 정권의 향배와 직결됐다.
예로부터 예(禮)는 ‘자연의 이치가 현상적으로 드러난 것(天理之節文·천리지절문)’이라고 했다. 자연의 이치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인간사회에서 예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우주자연의 이치를 통찰하는 학덕(學德)을 가졌다는 것이고, 이런 능력을 가진 자는 군자로서 소인들을 교화하고 통치할 자격을 갖는다.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추구했던 조선에서 ‘예’를 정확히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정치 현실에서 정권을 획득할 조건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런 논리를 정치 현실에서 주도했던 것이 바로 이이-김장생-김집의 적통을 자부했던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은 함께 북벌을 꿈꿨던 효종이 죽자 화양구곡에 물러나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중앙정계를 좌우하는 서인의 수장이었다. 그는 맑은 물가에 앉아 마음을 다스리며 왕에게 상소문을 올렸고 제자들을 통해 사림의 힘을 보여줬다. 그는 사대부들이 학문적 이념적 차이에 따른 집단을 형성해 정치에 참여하는 ‘붕당(朋黨)정치’에서 반대파의 입장도 함께 수용해야 한다는 이이의 온건론보다는 군자와 소인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김장생의 강경론을 따랐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딛고 소중화(小中華)를 내세워서라도 청나라에 맞서며 자존심을 회복하고 내부 결속을 다지려 했던 그로서는 이런 강경론을 취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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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예송을 통해 정권이 뒤바뀌면서 예송은 단순히 예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목숨을 건 정쟁으로 변해 갔고 경신환국(庚申換局·1680), 기사환국(己巳換局·1689), 갑술환국(甲戌換局·1694)으로 이어졌다. 기사환국에서 집권한 남인은 끈질기게 송시열의 제거를 요구했고 82세의 이 거인은 끝내 사약을 받고 만다. 그러나 ‘성스럽게’ 죽은 그는 갑술환국으로 복권되어 사림의 ‘신화’가 됐다.
좋게 말하면 조선의 예학은 송시열에 이르러서 정치 현실에서 실천으로 완성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예학이 현실 정치와 결합하면서 그 폐단을 극단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그가 ‘신화’로 부활한 후 서인을 중심으로 한 사림의 위세는 왕실을 압도하며 정권을 좌우했다.
그러나 지금 암서재 건너 편에 그의 뜻에 따라 제자 권상하가 세운 만동묘(萬東廟)는 세월을 못 이기고 허물어져 가고 있다. 만동묘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 준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기 위해 숙종 29년(1703)에 세운 거대한 사당으로 사림의 소중화 정신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제 송시열을 따르던 선비들 대신 맑은 화양구곡을 가득 메우고 있는 행락객들에게 그가 세우려 했던 예학의 정신과 무너져 내리는 소중화는 관심 밖의 일인 듯하다.
▼17세기 서인-남인 예송논쟁▼
17세기 조선에서 서인과 남인 사이에 벌어진 예송논쟁(禮訟論爭)은 도덕적 이상국가를 지향했던 조선에서 학문이 정치와 결합하면서 일어난 독특한 현상이었다. 유학에 따르면 예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실천은 모든 공부의 기본이었고, 또한 모든 공부는 예의 실천을 통해서 삶 속에서 완성된다. 따라서 정계에서 벌어진 예송논쟁은 곧 누가 통치를 담당할 만한 자격이 있는가를 논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왕실의 상례(喪禮)를 둘러싸고 벌어진 기해예송(己亥禮訟·1659)과 갑인예송(甲寅禮訟·1674)은 성리학적 이상국가에서 본보기가 돼야 할 왕실의 예법을 논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본래 유가에서 나라의 정치는 왕의 수신으로부터 비롯되고 왕실은 온 천하의 모범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왕실의 예법은 곧 정치의 근간이라고 볼 수 있다.
기해예송은 효종이 죽자 효종의 계모였던 자의대비 조씨가 효종에 대한 상복을 몇 년간 입어야 하는가를 둘러싼 것이었다. 효종은 맏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요절한 형 소현세자와 조카를 대신해 세자로 책봉됐었기 때문에, 이는 효종의 정통성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것이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은 효종이 둘째아들로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3년상이 아닌 1년상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미수 허목(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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