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위암 수술을 받은 뒤 15kg이 줄어 예전보다 훨씬 여윈 모습이었지만,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내내 힘찬 목소리는 여전했다.
“요즘은 괜찮아요. 엊그제는 한 일간지에서 요청도 받았어요. 월드컵 개막식을 보고 글을 써달라나. 우리 집사람이 단번에 잘라서 거절했지요.”
경기장에 몇 시간 앉아 있기도 아직은 힘이 들고, 신문 나오는 시간에 맞춰 쫓기듯이 글쓰는 것도 싫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건 나보다 젊은 작가들이 보고 써야지요. 사실 집사람이 기자들도 못 만나게 하는데 이번엔 왠일인지 몰라.(웃음)”
오랜 시간 글을 읽거나 쓰기에 아직 힘이 많이 부친다는 그는, 집 근처 올림픽 공원에 산책을 가거나 새로 나온 중단편,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제출한 글을 읽으며 하루를 보낸다.
“‘프로작가’로 프로답게 글을 쓰는 젊은 작가들을 보면 기분이 좋습니다. 몇 일전 계간지 ‘문학동네’ 여름호에 실린 은희경의 중편소설 ‘누가 꽃피는 봄날 리기다소나무 숲에 덫을 놓았을까’를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어요. 무슨 소재든 재밌게 얘기를 풀어내는 능력이 있어요.”
한창 작품 활동을 할 30∼40대에 유신과 삭막한 5공 시절을 겪으면서 ‘마음대로 기펴고’ 글을 쓴 적이 없어 아쉽다는 노대가. 직접 몸으로 탄압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정신적 공황이 심했단다.
“5·18 이후 신군부에 의해 이호근 송기수 문익환 같은 이들이 옥살이를 할 때, 옥 밖에 있는 ‘창살없는 감옥’에 갇힌 이들이 옥바라지를 했지요. 인권변호사들이 무료변론을 해줬지만, 한 사람당 수입인지대 30만원까지 의지할 수 없잖습니까. 여기 저기 돈 구하러 다니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통성없는 권력이 불쑥 튀어나와 권력을 행사하는데 문인들이 ‘구색 맞추기’로 들어가는 것, 이것이 처음 있는 일일까….”
그의 생각은 만해 이육사를 거쳐 대한제국의 황매창, 조선후기의 김삿갓, 수양대군 시절의 사육신 생육신까지 저항 문인의 역사를 타고 거슬러 올라간다. 이러한 맥락 속에 태어난 작품이 ‘매월당 김시습’(1992·문이당). 사실 인터뷰를 청한 것도 최근 개정판이 나온 ‘매월당 김시습’이 계기가 됐다.
“쓰는 데만 2년 이상 걸릴 정도로 힘을 들였죠. 김시습은 우리나라 최초의 저항적 지식인이자 시인이예요. 외로움과 핍박을 이기며 시대와 불화하면서 살아낸 재야 문인의 전형이죠. 이 사람의 얘기를 써보면 신군부 아래 고생하는 문인의 정체성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지천명이 지나 철들고 온 힘을 다해 쓴 작품이어서 평론가나 독자들이 작품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한다 해도 더 이상 내 손으로 어떻게 할 수 없어요.”
20여만부 이상 판매돼(‘관촌수필’보다 더 많다) 처음 그에게 서재를 마련해줬다는 이 작품은 토속적인 어휘를 풍부하게 사용하고, 김시습이 쓴 수십편의 한시를 유려하게 한글로 옮기는 등 매월당의 삶의 진수를 형상화해 낸 역작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개정판에서는 오자와 탈자를 꼼꼼히 손보고 문법을 현대화했다.
그는 일주일에 9시간씩 수원 경기대 한국·동양어문학부 문예창작전공 학생들에게 ‘현대소설읽기’ ‘현대소설쓰기’ 등을 가르친다. 젊은 세대의 글쓰기를 최전선에서 접하는 ‘이문구 교수님’의 의견이 궁금했다.
“사이버상의 ‘글쓰기’와 현실 속의 ‘글쓰기’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아요. ‘엽기적’이거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엉뚱한 것도 좋긴 하지만 글 속에서 형상화되질 않아요. 이러한 글을 문학이라고 할 수 없지요. 때론 중고등학생 작문 과외하듯이 달래가면서 가르칩니다.”
걱정하는 내용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는 즐거워 어쩔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막내 아들 딸 뻘되는 학생들과 어울려 ‘노는’ 일이 참으로 재밌고 신선한 모양이었다. 위암 수술을 받기 전 맡았던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직도 ‘분에 넘치는 역할’이었고, 평생 ‘남의 덕’에 살았다는 그는 학생들에게 ‘여유있게 사는 척’하는게 늘 마음에 걸린다.
“우리 집사람이 지금까지 계를 한번 못해봤어요. 내가 일정한 수입이 없으니까요. 우리 학생들에게는 이런 얘기 입도 벙긋 안합니다. 꼭 순수문학 하라고 얘기하지도 않아요. 젊은 작가들 상업주의 문학해도 탓하고 싶지 않구요.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는 믿음에서지요.”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