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하고 뜨면 황홀한 무아의 세계로… '초경량 비행기'

  • 입력 2002년 6월 6일 18시 55분


[사진=전영한기자, 항공촬영협조=(주)에어로피아]
[사진=전영한기자, 항공촬영협조=(주)에어로피아]
북미와 유럽 등에서 꽃피고 있는 ‘자가용 비행기’ 시대가 한국 사회에서도 막을 올리고 있다. 그 주역은 세스나형 경비행기를 축소한 모습의전체 중량 225㎏ 이하 초경량비행기(ULP)다. 프랑스 베스트오프사가 설계한 2인승 스카이레인저를 갖고 있는 한창용씨(42·창텍컴퓨터 대표)도 이 자가용 비행기 소유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평생 소원이 내 손으로 비행기를 몰아보는 것’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형제애 같은 것을 느낀다는 조성용씨(49·학원업)와 함께 이 비행기를 마련했다. 두 사람 다 이름에 용(龍)자를 쓰는 바람에 애기(愛機)는 ‘플라잉 드래건스’라 불린다.

●매일 기상청 홈페이지에 들락날락

서울 용산 전자랜드 신관 3층에서 매장을 운영하는 그는 매일 기상청 홈페이지에 들어간다. 1일 오후 잠시 비가 내리자 “흐흠, 지금 활주로에 나가 있는 친구들은 난감하겠는 걸” 하고 생각해 본다. 그의 비행기는 경기 화성시 송산면 고포리 어섬의 비행스쿨 에어로피아(www.aeropia.co.kr) 활주로 근처에 세워져 있다. 원래 컨테이너를 개조해 격납고까지 마련했으나 지난해 이를 포기했다. 격납고에 넣었다 꺼낼 때마다 날개를 분해하고 조립해야 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대신 두툼한 커버를 씌웠다. 하지만 비가 오면 “비행기는 잘 있나”하는 생각에 빠진다. 전자랜드가 쉬는 화요일이면 그는 상계동 집을 출발해 여의도에 사는 조씨를 태우고 어섬으로 향한다.

●하늘에서의 레저를 위한 인연

4일 그는 혼자 비행에 나섰다. 어섬에 도착해 가장 먼저 애기에게 “잘 있었느냐”는 인사를 건넨다.

그가 조씨와 이 비행기를 함께 구입한 데는 특이한 인연이 있었다. 조씨는 98년 여름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의 모의비행 소프트웨어 ‘플라이트 시뮬레이터(FS)’를 구동할 컴퓨터 구입을 위해 전자랜드에 들렀다가 처음 한씨를 만났다.

이 소프트웨어는 지난해 미국 세계무역센터 붕괴 테러를 저지른 알 카에다가 연습용으로 썼다는 사실 때문에 엉뚱한 비난을 받았지만 80년대 후반부터 비행 지망생들 사이에 널리 애용되고 있었다. 뉴욕 존 F 케네디 공항부터 부산 김해공항까지 전세계 공항을 정확하게 재현한데다 갖가지 비행기를 골라가며 모의조종할 수 있기 때문.

조씨는 1년 후 여름 FS 업그레이드판 구동 장비를 사기 위해 전자랜드에 다시 들렀다. 그때 두 사람은 서로 매주 다른 날 각각 에어로피아에서 실제 비행 교육 중임을 알게 됐다.

그들은 이후 대망의 ‘자가용 비행기’를 함께 구하려고 1년여 동안 인터넷을 뒤져 스카이레인저를 택했다. 현재 인터넷 상의 가격은 2만2000달러(약 2750만원), 순항 속도 120∼150㎞, 순항 고도 150∼300m, 최고 고도 1500m. 저렴한 가격과 안전성이 강점이었다. 2000년 8월 수입된 이 비행기 부품은 공군사관학교에서 수학한 에어로피아의 이규익 교관(36)이 7개월 작업 끝에 조립, 시험비행까지 마쳤다. 페인트칠 등 마무리를 하고 난 지난해 8월, 두 사람은 자기 비행기를 모는 ‘자가용 비행기 조종사’가 돼 있었다.

●바람에 순응해야

자동차에만 번호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초경량 비행기에도 있다. 어섬에 도착한 한씨가 비행기 커버를 벗겨내자 번호판이 보인다. 서울지방항공청에서 부여한 것이다. 플라잉 드래건스의 번호는 ‘S2083’. S는 서울, 20은 경비행기처럼 모습을 갖춘 ULP란 뜻. 마지막 두자리는 그의 신고 번호 83번이다.

한씨는 “비행하는 사람들은 모험심보다 조심성을 더 철저하게 갖춘 이들”이라고 말했다. “활주로에 나온 후 시간의 70% 이상을 정비 점검에 쏟는다”는 것이다. 그는 기체 외부의 볼트와 바퀴 상태, 엔진 오일과 냉각수 상태 등을 꼼꼼히 살핀 후 예열을 할 겸 엔진에 시동을 걸어 본다. ‘푸르르릉∼부웅∼.’ 이상이 없다.

그는 지금까지 1000회 이상 이륙했다. 불시착 1회, 공중에서 엔진을 재점화한 적이 한번 있을 뿐 다친 사고는 없었다. 그래도 만반의 태세를 갖추기 위해 조종석 뒤에는 낙하산이 들어 있다. 만에 하나 이상이 생길 경우 버튼을 누르면 조종석 뒤에서 낙하산이 든 로켓이 튀어나온다. 비행기를 추처럼 매달고 내려오기 위해서다. 그는 “정비를 열심히 하는 이유는 바람의 요구에 제대로 응하기 위해서다. 바람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바람이 비행의 모든 걸 배려해준다”고 말했다.

그는 점검이 끝난 비행기 조종석에 올라타 활주로 끝에 비행기를 세운다. 그가 반드시 바라보는 것은 활주로마다 마련된 윈드색. 통풍이 잘 되는 바람 주머니다. 윈드색의 끝이 팔랑거린다. 바람이 불안정한 것이다. 그는 잠시 기다리기로 한다.

엔진을 다시 확인한다. 그의 비행기 엔진은, 동력을 만들어내는 실린더가 4개인 4기통 엔진이다. 보통 4기통 자동차의 경우 4개의 실린더마다 불을 붙이는 점화플러그가 1개씩이다. 그러나 초경량 비행기에는 2개씩 있다. 1개의 점화플러그가 작동이 안될 경우 다른 하나를 작동시킬 수 있다. 한씨는 점화플러그에도 이상이 없음을 확인해 본다.

드디어 윈드색이 활주로와 나란한 방향이 됐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릴 때 곧게 불어오는 맞바람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활주로와 나란한 방향이 된 윈드색은 45∼60도 각도로 약간 처진다. 세지 않고 적당한 바람이란 뜻이다. 이륙 시간이 됐다.

그는 조절판을 죽 잡아당겨 엔진의 출력을 최대로 만든다. 비행기가 활주로 끝을 향해 질주하더니 바람의 도움을 받아 떠오른다. 그 순간 그는 오전 9시 출근, 오후 9시 퇴근의 일상으로부터도 탈출한다.

“언제 이륙해도 흥분된다. 골프는 전혀 못 하지만 아마 홀인원한 때의 기분이 이럴 것이다.”

●현실은 멀어져 있을 때 아름답다

그는 아들(17) 딸(13)에게 차례차례 비행을 체험하게 했다. 지난달에는 부인 김은숙씨(43) 역시 처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무섭게 여겼는데, 흥분되고 다소 황홀했다”는 것이 김씨의 말이다. 그러나 한씨는 이날 홀로 이륙하고 나니 그 나름의 독특한 느낌이 있다.

그의 비행기는 날개가 기체 위쪽에 붙은 ‘고익기’다. 날개가 조종석 위에 있어 지상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조종석인 왼쪽에는 조씨와 번갈아 앉는다. 조씨는 오른쪽에 앉을 때 주로 촬영에 몰두한다.

한씨는 촬영 대신 음미할 뿐이다. 시간이 흐르면 과거가 그윽하게 채색되듯, 하늘로 오르면 지상의 현실 역시 아름답게 비친다.

어섬에서 이륙하면 남서쪽 제부도로 향했다가 다시 북서쪽 대부도 송도로 올라올 수 있다. 조종간은 앞뒤로 움직이면 상승·하강하고, 좌우로 조작하면 비행기가 좌우로 움직인다. 이들의 조합이 조종이다. 제부도 갯벌에 조개 잡으러 온 사람들이 손을 흔든다. 답례하듯 갯벌 끝의 바위 상공에서 한 바퀴. 대부도의 해안선을 따라 크게 또 한 바퀴. 송도 유원지의 커다란 놀이기구 위의 상공도 한번 휘감아 본다.

가장 아름다운 비행은 서해안의 수면이 거대한 붉은 빛으로 물든 일몰(日沒) 무렵. 그는 “이때는 낙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낙조 속으로 들어간 느낌”이라고 말했다. 안개가 비낀 대부도의 솔숲을 내려다보면 커다란 한국화 위를 날고 있는 느낌이다.

그는 언젠가 그림에서 그림 위를 건너가듯 조금씩 기착해가며 전국을 ‘징검다리 비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같은 비행스쿨 출신의 비행클럽 회원들과 함께…. 그는 그 꿈과 함께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이날 오후 늦게 현실을 향해 상경했다.

화성〓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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