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흐름보다 더 빠른 변화를 원하는 인간은 혼자만 변해 가는 것으론 부족해서 자연까지도 그 형체를 바꿔놓고야 만다.
불쑥불쑥 솟은 산들 사이로 그득히 푸른 물을 머금은 채 절경을 이루는 충북 충주와 제천 지역의 충주호는 ‘인간’들이 댐으로 물길을 막아 만든 인공호수다. 그 물 아래에는 오랜 세월 쌓여 온 자연과 인간의 흔적이 잠겨 있다.
수암 권상하(遂庵 權尙夏·1641∼1721)와 그의 제자인 외암 이간(巍巖 李柬·1677∼1727),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震·1682∼1751) 등이 함께 인성물성논쟁(人性物性論爭)을 벌이던 ‘한수재(寒水齋)’ 터도 이제 충주호 아래 있다.
“율곡 선생께서 말씀하시길 ‘사람과 짐승의 본성(性)이 다른 것은 만물을 형성하는 기(氣)가 시공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이고, 사람과 짐승의 이치(理)가 같은 것은 리(理)가 본래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느니라.” (권상하)
“사람과 짐승의 본성은 바로 하늘이 부여해 준 ‘리’가 아닙니까?” (이간)
“하늘이 사람과 짐승에게 부여해 준 ‘리’는 본래 같아도, 그것이 사물 안에 들어와 성(性)이 됐을 때는 이미 달라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원진)
18세기 초 수도권과 충청권 지식인 사회를 뜨겁게 달궜고 나아가 조선 전역으로 확산됐던 인성물성논쟁. 이들은 이 문제를 조선성리학계의 최대 쟁점으로 끌어냈다.
▼조선 성리학계 뒤흔들어
사람과 짐승의 본성은 같을까, 다를까? 뭍을 호수로 만들고는 그곳에 있던 집을 통째로 언덕에 옮겨다 놓는 ‘인간’들을 두고 어찌 짐승과 그 본성을 비교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낯선 언덕에 옮겨져 묵묵히 충주호의 옛 자리를 바라다보고 있는 ‘한수재’를 보면 일단 사람과 짐승의 본성은 ‘다르다’는 쪽의 손을 들어줘야 할 듯하다.
하지만 ‘같다’를 주장했던 이간이 쉽게 물러설 것 같지는 않다. 이들이 논쟁을 벌였던 것은 물길을 막고 집을 떠다 옮기는 등의 기술적 능력이나 심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성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짐승도 인간처럼 도덕적 본성을 온전히 다 가지고 있는 것일까? 세상에는 악이 난무하는데, 본성이 겉으로 드러나기 전의 마음 속에는 정말로 악한 마음의 뿌리가 없는 것일까? 사람과 짐승의 본성이 같다(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고 주장한 이간은 짐승도 인간처럼 도덕적 본성을 온전히 가지고 있고, 본성이 겉으로 드러나기 전의 마음의 뿌리는 모두 선하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사람과 짐승의 본성이 다르다(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고 주장한 한원진은 이에 대해 반대 의견을 펼쳤다. 박필주(朴弼周), 어유봉(魚有鳳), 이재(李縡) 등이 이간을 지지했고, 윤봉구(尹鳳九), 최징후(崔徵厚), 채지홍(蔡之洪) 등은 한원진의 주장에 동조했다. 도덕성을 근거로 짐승 또는 오랑캐와 인간의 차별성을 논한 이 논쟁은 ‘사단칠정논쟁’과 함께 조선성리학계 최대의 논쟁이 된다.
▼자연미 즐겼던 이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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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간의 흔적을 찾아 서쪽으로 길을 달려 충남 아산에 이르면 정취 있는 돌담과 옛집들이 잘 보존된 예안(禮安) 이씨의 외암 마을을 찾을 수 있다. 이간이 살았다는 ‘건재고택(健齋古宅)’의 안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 중 하나로 손꼽힌다.
샘에서 솟아 나와 정원을 굽이굽이 흐르는 작은 냇물, 한 걸음이면 건널 냇물 위에 운치 있게 걸쳐놓은 단아한 돌다리, 연기가 운무처럼 정원을 휘감도록 바닥으로 깔려진 굴뚝, 품격 있는 서재와 정자와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색이 가미되긴 했다지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자연의 오묘함을 정원 안에 오밀조밀하게 간직한 한국식 정원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이간은 이런 곳에서 우주만물이 모두 근본적으로 도덕적임을 느꼈던 것일까?
외암마을 옆의 강당골에는 유불이 공존하는 ‘강당사’란 희귀한 절이 있다. 본래 이간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지자 서원을 지키기 위해 승려를 모셔다 절로 둔갑시켜 간신히 명맥을 이었고, 그러다 보니 이제는 유교와 불교가 공존하는 뜻 깊은 장소가 됐다.
그런데 그 풍광 좋은 계곡에는 1980년대부터 불법으로 들어선 음식점들이 노래방을 차려놓고 서로 고성방가를 경쟁중이지만 아산시는 20여 년 동안 속수무책(束手無策)이다. 아무리 이간의 앞에서는 만물이 두루 회통한다고 해도 유(儒)와 불(佛)에 노래방까지 공존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듯하다.
▼논리 정연했던 한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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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광 좋은 내륙에 살았던 이간과 달리 한원진이 살았던 곳은 서쪽 끝으로 달려가 바다와 만나는 충남 홍성의 남당항이다.
드문드문 떠 있는 배 뒤로 바다와 하늘을 가르는 남당항의 낙조(落照)는 일품이었지만, 남당항에서 남당 한원진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다만 산기슭에 깔끔하게 마련된 그의 무덤과 그를 모신 사당 ‘양곡사(暘谷祠)’가 그 곳이 한원진이 살던 곳임을 알려 준다.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고 했던가. 대단히 논리정연하고 치밀해서 선배인 이간을 종종 당혹스럽게 했던 그의 글은 바로 이 바다의 지혜로부터 나온 것인지 모른다. 그는 그 논리정연함을 가지고 도적적인 면에서 사람과 짐승을 근본적으로 구분하려 했다.
사람과 짐승의 본성은 정말 다른 것일까? 사람과 짐승의 근본적인 차이는 어떤 것일까? 이것은 지금도 쉽게 결론지을 수 없는 문제지만, 이성과 지능을 기준으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사회와, 도덕성을 기준으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며 전국적인 논쟁을 벌이는 사회는 분명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간-한원진의 '人性物性논쟁'
사람과 짐승의 본성은 같을까 다를까?
만물이 하나의 우주 안에서 일정한 법칙을 따르며 살아간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면 사람과 짐승은 자연으로부터 동일한 이치를 받아 태어나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생명체로 봐야 한다. 하지만 사람과 짐승이 똑같을 수는 없다. 아무리 같은 우주의 법칙을 따른다 해도 사람과 짐승의 다른 특성들에 주목한다면 그 본성에서부터 서로 다르다고 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사람들 사이에도 저마다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람마다 본성이 다르다고 이야기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18세기 초 이간과 한원진에게서 시작돼 조선의 거의 모든 지식인들이 한 마디씩 견해를 내놓지 않을 수 없었던 인성물성논쟁(人性物性論爭)이 물론 이런 상식적 판단이 어려워서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간은 만물이 모두 절대적인 도덕성을 공유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한원진은 인간만이 그 도덕성을 온전히 가지고 있다는 점을 주장했지만 그 의도는 결국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이 중 어느 관점을 택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도덕적 이상의 중요성을 각인시켜서 현실사회에서 그 도덕성을 실현하는 데 더 효과적인가 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16세기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을 통해 도덕적 본성과 감성의 작용에 대한 면밀한 논의를 거쳐, 17세기에는 성리학적 이상사회가 자리를 굳건히 잡아가는 상황에서 예송(禮訟)을 통해 정치권에서까지 도덕적 이상사회의 구체적 제도화 문제를 논의했다. 그 뒤에 이어진 인성물성논쟁은 중화문화의 본산이었던 명나라가 망하고 오랑캐의 나라인 청나라를 형님의 나라로 모셔야 하는 현실에서 도덕성을 근거로 인간의 자격 문제를 논한 것이다.
이는 ‘가장 사람다운 사람의 문화’로서 중화문화를 추구하며 소중화(小中華)를 자부했던 조선이, 짐승에 가깝다고 여기며 천시했던 오랑캐의 강대한 세력을 현실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당시의 현실적 고민과 연관된 것이었다. 이런 고민은 뒷날 조선후기 실학자들 사이에서 오랑캐의 나라인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일 것인가, 또한 개화기에는 서양 오랑캐의 문화를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으로 이어진다.
김형찬 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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