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스: 어릴때부터였죠. 패전후 독일에서 축구는 잃어버린 과거의 영광을 대신해 주는 것이었어요. 1954년 독일이 월드컵 우승컵을 쥐었거든요. 당시 전쟁의 피해도 복구하지 못하고 있던 때에 월드컵 챔피언이 된 것이지요. 대단했습니다.
최: 당신은 작가로서 현실참여의 자세를 꾸준히 견지해왔지요?
그라스: 나는 파리에서 조각가 수업을 받은 뒤 1960년 귀국했습니다. 그 이듬해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는데, 당시 빌리 브란트 시장이 사민당 총리 후보로 선거전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를 지원한게 정치적 현실참여의 시작이었죠.
최: 나도 61년 장벽이 축조된 바로 뒤 베를린에 처음 갔습니다. 당시 미국 부통령이었던 존슨이 베를린을 방문했었고 브란트 시장이 그를 맞았죠.
그라스: 당시 몰랐던 일이 있어요. 나중에 공개된 비밀 자료에 따르면, 미국이 소련측으로부터 장벽 축조의 계획을 사전 통보받았다는 겁니다. 미국이 소련의 장벽 구축을 묵인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겁니다.
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브란트는 현상 (Status quo)에 대한 현실주의적 인식에서 동방정책을 추진한 것 같습니다. 현실을 당장 바꿀 수 없다면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작은 걸음의 정책'을 시작해야 한다는….
그라스: 그렇습니다. 그런 현실인식은 한국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 한국에서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만….
그라스: 독일 역시 어려웠습니다. 브란트의 긴장완화 정책은 보수 정당의 큰 반대를 불러왔습니다.
최: 브란트는 야당 당수에서 갑자기 집권한 건 아니지요. 그는 66년부터 69년까지 기민당과의 '대연정'에서 외무장관과 부총리를 지냈죠.
그라스: 외무장관 재직시절 이미 루마니아와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등의 성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최: 정치가 브란트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끼셨습니까?
그라스: 그는 정치가로선 매우 드문 자질을 보여주었습니다. 원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으나 동시에 실용주의자였습니다.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호가 '구체적 유토피아'라고 불렀던 그런 비전을 정치에서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통일'이라는 말을 일체 쓰지 않았지만 통일로 가는 전제조건을 마련하면서 가능한 것부터 추구하는 그런 모습에 나는 매료되었지요.
최: 인간적인 면에서는?
그라스: 그는 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었죠. 정치가들은 대부분 조급하고 듣기보다 스스로 말하기만 좋아하지 않습니까. 브란트는 달랐습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들었어요. 연설문을 쓸 때도 물론 자기가 썼지만 네다섯사람에게 문안을 보이고 조언을 듣곤 했죠.
최: 20세기 독일에는 권력과 정신, 정치와 문학이 접근해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희한한 기회가 브란트때 주어졌습니다. 당신은 정치와 문학의 다리를 놓은 역할을 수행했죠.
그라스: 빌리 브란트가 있었기에 정치화 문학의 대화가 가능했었지요. 브란트는 이 시기에 외롭지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에는 브루노 크라이스키, 스웨덴에는 올라프 팔메가 총리로 있었죠. 이 세 사회민주당 총리는 친구였습니다. 브란트는 남북문제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의 갈등)의 심각성을 감지하고 '남북위원회'의 의장 직을 맡았죠. 이 문제를 팔메도 일찍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최: 중요한 인물들을 거론하셨군요. 브란트 크라이스키 팔메 이 위대한 세 인물을 통해서 서유럽의 사회주의는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라는 확고한 전통을 보여주었습니다. 유렵에서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엄연히 다르다는 것도….
그라스: 나 역시 공산주의를 반대해왔지만 브란트는 이런 점에서 더욱 단호했습니다. 브란트는 공산주의를 사회주의의 못된 실패작으로서 혐오했습니다. 다만 그는 그러한 공산주의가 하나의 세력권으로 실재한다는 걸 인정 않을 수 없었고 그들을 변화시키려면 대립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대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거지요.
최: 2차대전 직후 소련은 모든 점령지역에서 동일한 전략을 수행했습니다. 1945년 동독에서는 온건보수에서 극좌에 이르는 세력을 모아들여 반파시스트 민족전선(Nationalfront)을 수립했죠. 한국에서는 1946년 민족주의자로부터 극좌에 이르는 세력을 규합해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했습니다.
그 다음 동독에서는 1946년 4월에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강제합병이 이루어져 '사회주의 통일당'으로 탈바꿈했으나 서독의 사회민주당은 공산당 합당제안을 단호히 거부했지요.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북한의 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당하여 북로당을, 남한의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 3당이 합당하여 남로당을 결성했습니다. 독일에서도, 한국에서도 공산당 일당독재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수순이었지요.
그라스: 그렇습니다. 서독과 서베를린에선 사회민주당이 공산당과의 합당에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합당이 결국 공산당 일당지배로 굳어지게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50년대의 아데나워는 공산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를 동일시하려 했으나 여기에 대해 사회민주당은 당연히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최: 사회민주당의 반발에는 근거가 있었습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공산당과 투쟁해온 전통이 있었으니까요.
그라스: 공산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보수주의자보다 더 미워했습니다.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공산주의자들은 공적(公敵) 1호를 파시스트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자로 꼽았죠. 그무렵 베를린에서는 사회민주당의 연립정부에 반대하는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울브리히트 (전후 동독 공산당의 최고지도자)와 괴벨스 (나치의 제 2인자로 히틀러 정권의 선전계몽성장관)가 한 테이블에 앉아 협력을 다짐한 일도 있지요. 나치당원과 공산당원이 공동으로 사회민주당 정부에 대항했던 것입니다.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협력은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난것입니다. 그랬기에 2차대전후 쿠르트 슈마허, 에른스트 로이터 등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공산당의 합당제안을 거부했으며 이로써 서독 사민당이 정체성을 입증하게 된 것입니다.
최: 한국의 북방정책에서 어려운 점이라면,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강력한 좌파세력이 없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독일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공산당과 온건 사회주의 정당이 합당해버린 때문이지요. 어떤 영국의 정치학자가 서독의 동방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첫째 요건으로 그를 추진한 주역이 반(反)파시스트이자 반공주의자로 국제적인 공인을 받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 생각납니다.
그라스: 브란트는 공산주의의 적수였지만 소위 '반공'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문제보다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분명한 대립과 경계설정이 중요한 것이었지요.
최: 1990년 이후 유럽의 공산주의는 몰락해 버렸습니다. 그 이후 '역사의 종언'과 같은 여러 가지 역사이론이 등장했습니다만.
그라스: 역사의 종언을 말한 사람은 공산주의 뿐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의 종언까지도 이야기했죠.
최: 하지만 1990년 이후 서유럽에서는 많은 사회민주주의 정권이 등장했지요.
그라스: 지금은 상황이 다시 반대로 됐습니다. 유럽에서 우파 정권이 점점 더 대두하고 있습니다. 우파 연정의 참여자들은 포퓰리즘적 경향을 띠며 파시즘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합니다. 오스트리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고 이탈리아가 뒤를 이었으며 덴마크도 그렇게 됐죠. 프랑스 대선에선 극우 후보가 결선에 오르기도 했고…. 이런 유럽의 상황은 대단히 우려됩니다. 올 가을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는 이런 경향이 재현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최: 최근 유럽에서 우파정권이 득세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라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외국인 적대감정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화와 경제통합에 따라 실업률이 늘자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을 선동하고 있는 거죠. 80년대 레이건과 대처의 신자유주의가 퍼지게 된 이후 의회의 결정권한은 점점 축소되고 대신 경제의 권력이 커지고 있습니다. 독일의 경우도 예컨대 새로운 보건정책을 수립하려 하면 산업계의 동의를 얻지 않으면 안되게 됐습니다. 민주주의적 절차의 공동화가 우려됩니다. 은행과 기업의 힘이 커져서 의회를 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최: 1990년 동유럽권의 총체적 붕괴 후 사람들은 '대안 없는 하나의 세계' 에 살고 있습니다. 사회민주주의자조차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지향하기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지향한다고 자인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라스: 사회주의 블록이 있을 때는 자본주의가 더 나은 모습을 보이려 열심히 노력했죠. 최소한 유럽에서는 강력한 사회보장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사라지자 자본주의는 상대가 없어졌습니다. 상대가 없다는 사실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의회가 가졌던 힘마저 산업계와 금융계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적 통제의 바깥쪽으로 권력이 이동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세계가 붕괴한 지금 사회민주주의 자들 가운데 브란트나 팔메, 크라이스키와 같이 비전을 갖춘 새로운 실용주의자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최: 19세기 독일의 사회주의 운동처럼 20세기 독일은 새로운 정치사조를 창출했습니다. 녹색주의 운동 말입니다. 사회민주당과 녹색당과의 관계는?
그라스: 녹색당은 사회민주장의 사생아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아버지는 헬무트 슈미트입니다. 브란트는 사회민주당 내부에 에플러와 같은 녹색주의자들을 중용했습니다만 슈미트 총리는 생태학적 녹색 이념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녹색당이 생겨났죠.
녹색당이 선거에서 살아남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녹색당은 변화해야 하고 단순한 환경운동에서 벗어나 사회정책, 경제정책, 방위정책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을 넓혀야 할것입니다.
최: 많은 한국인들은 귄터 그라스 같은 진보적 참여작가가 독일통일을 반대했다는 사실을 잘 이해 못하고 있어요. 이곳에서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 외치는 것이 진보적 지식인이라 여겨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라스: 나는 통일의 '과정'에 대해 의문을 던진 것입니다. 서독이 동독을 인수하는 형식의 합병 말입니다. 이 과정에서 서독은 '승리자'로 등장했습니다. 12년이 지난 지금 동서독의 차이는 예전보다 더 커졌습니다. 환상은 깨져버렸죠. 빌리 브란트는 "원래 같이 있었던 것은 자라서 다시 하나가 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통일은 '성장'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 내가 알기로는 작가 마틴 발저와 당신은 함께 '47그룹' 출신으로 전후의 독일문학을 대표하고 있는데 통일을 전후해서 큰 논쟁이 있었지요. 귄터 그라스와 마틴 발저의 기본적 대립은 무엇입니까.
그라스: 일언이폐지하면 나는 '역사의식'에서 출발하고 마틴 발저는 '역사감정'에서 출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작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역사의식입니다. 지나간 역사를 끊임없이 화두에 올리는 것이 또한 문학의 중요한 책무입니다. 한국의 경우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최: 그건 한국보다 일본과 비교하는 것이 흥미로울 듯한데….
그라스: 일본은 피비린내 나는 과거를 인도적, 인간적으로 되돌아보고 밝혀본다는 데에 무능합니다. 일본의 커다란 핸디캡이지요.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잘못을 깨닫지도 못할뿐만 아니라 깨닫는다 해도 그걸 내놓고 말하지도 않지요.
최: 일본의 노벨상 수상작가인 오에 겐자부로와는 친교를 유지하고 있지요? 두분의 왕복서한을 읽었습니다.
그라스: 그는 일본에서 과거문제를 공론화하는 소수이고 그 때문에 국내에서 많은 반대에 부딪치는 인물이기도 하죠.
최: 그는 히로시마의 희생자 중엔 한국인도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 소수의 일본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큰 관점에서 보면, 2차대전은 히로시마를 넘어서는 거대한 비극이었고 대학살도 있었습니다. 유럽에서는 아우슈비츠가, 아시아에서는 남경 대학살이….
그라스: 그러나 가장 커다란 전쟁범죄는 미국이 일으킨 것입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투하는 전쟁범죄입니다.
최: 전쟁 말기에는 유럽에서도 민간인들에 대한 드레스덴의 융단폭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고발한 이들은 독일인이 아닌 외국 작가들이었습니다. 반면 남경 대학살에 대해 일본인들은 완전히 침묵을 지키면서 히로시마의 비극에 대해서는 전세계를 향해 희생자로서의 이미지를 선전하고 있습니다. 태평양전쟁의 전범 일본은 히로시마로 인해 졸지에 가해자에서 희생자로 변신한 것입니다.
그라스: 일본의 비행을 고발하는 것은 한국 작가들이 해야 할 몫입니다. 히로시마를 고발한 훌륭한 작품은 많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중국이나 한국에서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세계에 알려진 작품들이 별로 없습니다.
최: 그점에서는 한국 문학계에 책임이 있겠지요. 그래도 문제는 남습니다. 나는 드레스덴에 가서 그 도시가 겪은 엄청난 비극을 실감했습니다. 그렇지만 독일인들은 거기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라스: 그렇습니다. 미국인과 네덜란드인이 이 폭격에 대해 문학 작품으로 쓴 바가 있지만 독일인의 작품은 없습니다. 내 경우 단치히 철수를 최근작에 쓴 바 있죠. 그러나 드레스덴 폭격에 대해서는 쓰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도시 민간인에 대한 폭격은 사실 독일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코벤트리와 같은 영국 도시들을 초토화하려 했거든요.
최: 우리들의 눈에는 과거를 잊어버리지 못하는 독일인은 기억의 천재들이요, 일본인은 망각의 천재들만 같군요.
그라스: 맞습니다. 차이는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일본을 향해 분명하게 '제발 좀 달라져라!'고 말해야 합니다. 나도 그러고 있어요.
최: 베트남의 전쟁기념관에 간 일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히로시마 원폭투하로 부서진 보도(步道)의 돌조각 하나가 기증되어 유리액틀에 전시돼 있더군요. 이런 식으로 일본인들은 가해자가 아니라 희생자로서의 모습을 계속 세계에 선전하고 있습니다. 히로시마 돔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듯이 말이죠. 이건 어딘가 옳지 않습니다.
그라스: 옳지 않죠. 그러나 원폭투하는 분명 범죄입니다.
최: 제 의견은 다릅니다. 일본인들 뿐 아니라 한국인들에게도 원폭투하는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지 않았다면 일본인들은 일본 본토에 상륙하는 미국인과 마지막 한명까지 싸우려 초토작전을 준비했고, 희생자는 더 커졌을 것입니다.
그라스: 그러나 원폭의 결과는 일본을 훨씬 넘어서는 광대한 것입니다. 세계 전체가 변화했습니다. 동서진영이 원폭으로 무장하게 됐고, 그 결과 우리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그 두려움으로 전쟁에 이르지 못하고 있지만 이 폭탄들이 터질 경우 어떤 결과가 날 지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일본인들이 이를 선전수단화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최: 맞습니다. 그러나 원폭투하 20년 뒤 한 일본 의사가 미국 신문에 기고한 바에 따르면, 원폭이 투하된 덕에 전쟁이 조기 종결됐고 일본인들의 수많은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라스: 나중에 계산해보니 그렇다는 것인데, 나치는 가스 처형이 가장 인도적인 대량처형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다소 비판적으로 다시 말하더라도 용서하십시오. 일본의 범죄를 고발하는 것은 한국인들이 져야 할 몫인 것입니다.
최: 동감입니다. 과거 청산의 문제와 관련해서 나도 '가해자의 책임'만이 아니라 '피해자의 책임' 도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난 연말 중국에서 난징대학살 후 50년이 지난 1987년에야 비로소 기념비가 건립된 걸 보고 그런 생각이 더욱 간절해 졌습니다.
그라스: 잠깐! 혹시 일본의 한국 침략을 기록한 박물관 같은 곳이 있나요? 이 다음 다시 방한한다면 그 곳부터 꼭 찾아가고 싶은데.
최: 독립기념관이라는 곳이 있지요. 서울서 1시간반 거리인데 이다음에 오시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분단의 마지막 현장인 한국을 방문하신 소감을 묻겠습니다.
그라스: 나는 이 나라에 와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한국의 분단선은 예전 독일보다 훨씬 철저하며, 통일의 과정도 훨씬 험난할 것입니다. 한국이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기를 바랍니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 과정에는 실용주의적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쪽의 체면을 잃는 일은 피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 사람들의 곤경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생활용품만 줄 것이 아니라 북쪽이 자립할 수 있는 산업기반을 세워주어야 할 것입니다. 북쪽 사람들이 제 고장을 탈출하는 일이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남한을 위해서도 좋을 것입니다.
<정리=최정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