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한강 새로 나다

  • 입력 2002년 6월 13일 19시 48분



서울 여의도 63빌딩 근처 한강에 떠 있는 바지선 10척에서 쏘아올린 불꽃과 구조미가 돋보이는 원효대교의 조명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한강의 야경을 만들었다. 서울시의 7t급 순찰용 행정선을 타고 원효대교 북단 둔치에서 80m 떨어진 강 위에서 촬영했다.
[사진=전영한기자]

《12일 새벽 서울의 한강을 깨운 것은 서해 바다였다.

상류에서 동이 트기 한참 전부터 인천 앞바다에서 밀려온 짭짤한 바닷물은 하류를 가로지르는 가양대교와 방화대교를 지나 20여㎞ 떨어진 잠실 수중보까지 물결을 밀어올리며 강을 흔들어 댔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하지만 서해 밀물때의 한강은 사정이 다르다. 거꾸로 흐르는 한강을 보자 청담공원 한강기념탑에서 건너편 쉐라톤워커힐호텔 위로 떠오르는 한강의 일출을 보려던 계획을 접었다. 대신 물의 흐름을 따라가기로 했다.

80년대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대대적으로 ‘개발’됐던 한강. 21세기 한일 월드컵에 즈음해서는 한강의 수변 생태계와 역사성 ‘복원’이 새로운 화두로 대두됐고 복원의 집중 대상이 된 지역은 한강 서편이었다. 초여름 한강 탐험은 서울의 서쪽 하류에서 시작됐다.》

이른 아침 산뜻한 강바람을 쐬기 가장 좋은 방법은 강변을 달리는 것이다. 조깅 코스로 선택한 마포구 상암동 난지 한강 공원은 난지도 앞 한강 둔치에 조성돼 지난달 1일 문을 열었다. 오전 6시 독일에서 정치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펠릭스 괴펠(25)이 먼저 나와 있었다. “도시 한가운데 이렇게 큰 강이 있다니 놀랍다”는 괴펠씨의 말에 “한강은 ‘큰 강’이라는 뜻도 된다”고 답해주었다.

괴펠씨는 친구 케빈 메이셀(24)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하는 중이다. 지난해 8월 고향 베를린에서 출발해 체코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터키 파키스탄 중국 등을 거쳐 월드컵 대회 개막일인 지난달 31일 서울을 찾았다.

괴펠씨는 “한강변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강남의 코엑스몰까지 다녀 왔다”며 흥분했다. 잠실대교와 광진교 사이의 자전거 도로 공사가 끝나는 2004년 12월이면 90㎞에 이르는 한강변을 자전거로 끊어지지 않고 한바퀴 돌 수 있다. 700명가량을 수용할 수 있는 캠핑장에는 괴펠씨처럼 빈 주머니로 세상 구경에 나선 수백명의 외국 젊은이들이 묵고 있다.

난지한강공원은 5개 월드컵 공원 중 하나다. 이 중 서해의 낙조를 감상하기 좋을 노을 공원을 빼고는 모두 최근에 개장했다. 내년 하반기 문을 여는 노을공원에는 9홀짜리 퍼블릭 골프장도 들어설 예정이다.

아이들이 있는 집이면 지금 계절에 분수가 시원한 물줄기를 내뿜는 난지호수가 나들이 코스로 제격이다. 월드컵경기장 앞쪽에 조성된 난지호수는 한강 상류 취수장에서 원수를 끌어다 쓰고 난지천을 통해 다시 한강으로 흘려 보낸다. 호수 위에 설치된 나무 데크는 어른들이 빙 둘러 앉아 하얀 다리를 내놓고 물에 발을 담그는 곳이다. 물 안으로 연결되는 데크 옆쪽 계단에서는 네댓살 먹은 조무래기들이 물에 허벅지까지 담그고 입술이 시퍼래지도록 물장구를 친다. 호수 아래쪽 여울목이 있는 실개천은 더 큰 아이들이 아예 웃통을 벗어놓고 멱을 감는다. 물놀이에 추워진 아이들이 몸과 옷을 말릴 수 있도록 나무 데크는 늘 햇볕에 따뜻하게 데워져 있다.

강을 건너면 하류 남단 강서구 개화동에 강서 습지생태공원이 7월 개장을 목표로 마무리 단장이 한창이다. 전체 8만여평 가운데 농구 축구 게이트볼 등을 할 수 있는 체육시설을 빼고는 전부 생태 공원이다. 올림픽 게임을 앞두고 만들었던 뚝섬이나 잠실 공원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우선 호안 블록이 없다. 강물이 오고 가며 쌓아놓은 모래톱과 발이 쑥쑥 빠지는 뻘밭이 수초 사이 사이로 펼쳐져 있고 그 위로 백로가 거닐며 먹이를 찾는다. 별다른 위락시설이 없어 공원 ‘조성’이라기도 민망하다. 철새들이 놀랄까봐 가로등도 달지 않았다. 그저 끝없이 펼쳐진 습지에는 부들 갈대 억새가 길게 자라 바람따라 몸을 흔들고 이름도 천한 망초 개쑥갓 돼지풀이 제멋대로 자라 있다. 습지 위로 조심스럽게 만들어 놓은 나무 데크를 따라 산책하며 자연의 천이 과정을 지켜 보면 된다.

서울서 30년 넘게 살도록 선유도를 알지 못했다. 이유를 알아 보니 1920년대부터 암석을 채취하느라 고운 자태가 허물어지기 시작해 1978년부터는 아예 수돗물을 공급하는 정수장으로 활용됐다는 것이다. 5월초 선유도 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기까지 1년 반동안 1600억원의 보수비를 들여야 했다.

선유도에는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싫은 두 곳이 있다. 하나는 정수지로 사용했던 건물의 콘크리트 상판 지붕을 뜯어내고 기둥만 남겨놓은 ‘녹색 기둥의 정원’이다. 기둥 아래쪽이 짙은 갈색으로 채색돼 있어 물었더니 정수지 시절 물에 잠겨 생긴 물때란다. 20여년간 착색돼온 물색은 물감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덩굴을 심어 기둥 전체를 녹색으로 덮겠다는 계획인데 물때가 가려지는 것은 좀 아깝다.

또 한 곳은 침전지를 보수해 당귀 향유 배초향 대나무 고사리 등을 심어 꾸민‘시간의 정원’.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소리를 듣고 있으면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녹색 기둥의 정원과 시간의 정원 안에서는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다.

뚝섬공원에 익숙한 서울 사람들도 둔치 위쪽에 100여m 길이로 조성된 윈드서핑 클럽촌은 낯설지 모르겠다. 60여개의 낡은 컨테이너 박스에 서핑 장비와 구명 재킷, 슈즈를 벗어 널어 놓은 클럽촌에 들어서면 지중해의 후미진 어촌에라도 와 있는 착각에 빠진다.

핫팬츠만 걸친 구릿빛 사내들은 십중팔구 클럽장들이다. 겨울 한철을 제외하고는 이곳에서 먹고 자며 바람불면 서핑을 즐기고 피부빛이 허여멀건 ‘서울 촌놈’들에게 바람 타는 법을 가르쳐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15년째 강풍클럽을 운영하는 김인환 클럽장(39)도 그중 한 사람. 김 클럽장은 “동력을 사용하는 수상스키와 바람에만 의존하는 윈드 서핑은 타는 맛이 다르다”고 한다. 윈드 서핑은 돛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바람을 잘 흘려보내야 한다. 김 클럽장이 경험한 최고 속도는 한강에서 시속 80㎞, 바다에서는 120㎞.

문명은 강에서 출발한다고들 한다.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최대 집단취락지인 강동구 암사동의 선사주거지 유적. 약 6000년 전 신석기 시대 조상들이 한강변에 움집을 짓고 고기잡이를 하며 살았다는 곳이다. 유적지는 건물에 갇혀 있고 유적지에서는 한강의 한 자락도 보이지 않았다. 한강과 유적지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도로와 건물은 한강으로부터 6000년이라는 역사를 앗아가 버렸다. 한강에는 20세기와 21세기만이 공존할 뿐이다.

서쪽으로 해가 넘어가느라 하늘이 발개질 즈음 잠실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여의도로 향했다. 시속 10노트(약 18㎞)로 달리는 유람선 1층에서 보는 한강은 강폭이나 포말의 규모가 바다라고 해야 어울릴 지경이다. 운이 좋으면 쌍둥이 빌딩 사이에 걸리는 석양을 볼 수 있다.

파리 센강에는 ‘바토 무슈’라는 유람선이 있다. 강변에는 유적이 즐비하고 다리마다 사연들도 많아 승무원은 끊임없이 서투른 영어로 안내 방송을 한다. 어느 다리인지는 기억에 없지만 “이 다리를 지날 때 키스를 하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전설이 내려온다”는 설명에 여기 저기서 ‘쭉’ 하고 입맞추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한강 유람선에서는 ‘미풍양속에 어긋나는 행동’이 금지돼있다. 그렇다고 사랑이 멈춰지나. 유람선 21세기호의 이국산 선장(45)과 승무원 서은영씨(28)는 미풍양속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수 없는 배에서 하루종일 근무하며 정이 들어 결혼한 사이다.

한강의 볼거리로 요즘엔 야경을 꼽는다. 24개 다리 중 동호 동작 성산 등 9개 다리에 설치된 조명이 그려내는 경관이다. 전문가들은 한강 다리 중 으뜸이 원효대교요, 야경도 원효가 제일이라고 꼽는다.

서현 교수(한양대 건축과)에 따르면 원효대교의 멋은 “최소한의 필요한 것만 있고 군더더기 하나 없이 가장 합리적으로 구조물을 만들었을 때 얻어지는 구조적인 아름다움”이다. 일요일인 16일과 23일 오후 8시반 여의도 63빌딩 앞 강가에서 펼쳐지는 세계불꽃축제를 감상하기 좋은 곳도 원효대교 북단의 둔치다.

다시 선유도. 아치형 선유교는 밤이면 무지개빛을 낸다. 노란색 나트륨등과 흰색 메탈할라이드등이 비추는 선유도는 밤에 봐도 아름답다. 선유도 공원은 정수장 시절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재활용해 만든 국내 최초의 재활용 공원이다. 빨갛게 녹이 슨 송수관이나 울퉁불퉁 낡은 콘크리트 벽은 쓰레기가 아니라 의도된 ‘작품’ 같다. 천덕꾸러기 산업 쓰레기들이 고사리 은방울꽃 이끼들에 어울려 다시 생명을 얻는다.

과거를 허물고 부수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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